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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과 세상만사] 23.금어(金魚) 만봉 스님의 두 제자

입력 : 2016-07-11 04:40:00 수정 : 2016-07-10 18: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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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8년 2월 화재로 불타버린 국보 1호 숭례문 단청 복구공사를 맡았던 단청장이 천연 안료 대신 화학안료를 사용한 혐의로 항소심에서도 실형을 선고받았다. “국민의 자긍심을 바로 세우고 전통의 맥을 잇기 위해 전통기법과 도구만 사용하기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화학안료를 쓴 것은 국민의 염원을 저버리는 노골적인 배임 행위로 그 비난 정도가 절대 가볍지 않다”이것이 재판부의 선고이유다.

숭례문의 단청 책임자로 법정에 선 사람은 우리나라 중요무형문화재 48호 단청장 가운데 한 사람인 홍창원이다. 어릴 적 만봉 스님 밑에서 단청을 배운 그는 1981년 전수장학생으로 선정된 데 이어 1986년 이수자가 되었다. 만봉 스님과 함께 국내 주요 궁궐과 사철의 단청을 도맡아 작업을 했다. 그의 뛰어난 단청작업으로 2009년 중요무형문화재 48호 단청장이 되었다. 그런 그가 옛 모습을 되살린 숭례문을 기대했던 국민의 마음에 상처를 준 것이다.

단청하면 우리나라 최고의 금어이신 만봉 스님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1918년 서울 봉원사에서 출가한 만봉 스님은 1928년 당대 최고의 금어(金魚)이신 김예운(金藝雲) 스님을 만나면서 불화(佛畫)의 세계에 접하게 되었다. 조선후기 전통화사의 맥을 계승한 김예운 스님은 구한말 이후 금강산 화맥을 이끌어온 불화와 단청계의 거장으로, 만봉 스님은 예운 스님과 함께 1933년 금강산 표훈사 나한전 단청시공을 했고, 이듬 해에는 유점사 단청 시공을 했다. 남북한의 주요 사찰의 불화, 탱화를 그린 만봉 스님은 1936년 10월 금어가 되었고, 1972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에 이름을 올렸다.

내가 젊은 시절 공주 마곡사에 잠시 머물렀던 적이 있다. 그때 사찰 단청이 너무 아름다워 넋이 나가있는 나를 보고 주지스님이 다가와 만봉 스님이 그린 것이라고 해서 한동안 그 화려함에 취했던 기억이 있다.

만봉 스님이 화승(畵僧)의 최고 지위인 금어(金魚)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타고 난 기예가 출중한 것도 있었지만, 수행의 한 방편으로 불화를 그렸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탱화 작품 하나를 완성하자면 예배용 불화와 작업용 불화를 수천 장 연습한 뒤에야 작업을 시작하였다고 하니 얼마나 일심으로 정진을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2006년에 입적하신 만봉 스님은 생전에 “단청은 우아하고 현란한 색채나 화술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하면서 “불화를 그리면 수행이 따로 없고 가피가 늘 뒤따릅니다”라고 말했다. 늘 수행하는 마음을 놓지 않으셨던 것이다.

독보적인 경지를 이루신 만봉 스님의 불화를 배우러 오는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공부에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 드물었다고 한다. 남다른 능력이 있어 보여 만봉 스님이 홍 단청장을 이수자로 삼았으나 스승의 판단을 부끄럽게 했으니 이를 어찌할 것인가.

봉원사에서 어려운 공부를 마친 제자 가운데는 낯선 외국인도 있었다. 브라이언 배리는 1967년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 왔다가 한국 전통문화에 푹 빠졌고, 특히 단청에 매료되어 만봉 스님과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탱화의 밑그림인 시왕초(十王草)를 모사하는 고행의 길로 들어섰는데, 한국인 제자와 함께 화실에 엉덩이를 붙이고 불화를 그렸지만 누가 일일이 가르쳐주는 것도 없고 너무 힘이 들어 다섯 번이나 보따리를 쌌었다고 한다. 그는 시왕초 3000장을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정식 전수자가 되었다. 1987년 조계종 외국인 포교사가 되었고, 1999년에는 태국 왕실사원의 부탁으로 탱화를 그릴 정도로 실력을 갖추어 스승의 뒤를 이었다.

2006년 만봉 스님이 입적하셨을 때 주위 사람들의 추천으로 스님의 유작을 맡아서 마무리한 사람도 그였다. 그는 암 투병을 하면서도 손에 힘이 빠져 붓을 들 수 없을 때까지 스승의 뒤를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잘 났다고 생각하는 아상(我相)에서 깨어나야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며 늘 겸손했던 그가 지난 7월 3일 많은 사람들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세상을 떠났다.

스승으로부터 재주만 배운 제자는 그저 기술자에 불과하다. 언제나 초심을 잃지 않고 아상에서 깨어나고자 했던 브라이언 배리의 부음을 들으면서 만봉 스님의 마음을 진정으로 이어받은 자가 누구였는지 생각해본다.


◇차길진

[약력] (사)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사)후암미래연구소 대표, 차일혁 기념사업회 대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운영자문위원, 현 경찰박물관 운영위원, 화관문화훈장 수훈, 넥센 히어로즈 구단주 대행

[저서] 어느날 당신에게 영혼이 보이기 시작한다면, 또 하나의 전쟁, 효자동1번지, 영혼산책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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