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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과 세상만사] 29. 달빛 속에 흐르는 사부곡(思父曲)

입력 : 2016-08-01 04:40:00 수정 : 2016-07-31 18:2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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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 궁궐에서 심신을 달래고 멋진 음악회와 아름다운 야경을 즐길 수 있는 고궁 야간기행은 무더위에 지친 시민들에게는 특별한 시간이 된다. 나도 여러 해 창덕궁에서 달빛기행을 한 적이 있다. 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며 청사초롱을 들고 달빛을 받으며 궁을 거니노라면 이곳에서 원대한 뜻을 펼치고자 했던 정조가 생각난다.

세계문화유산인 조선의 궁궐치고 슬픈 사연이 없는 궁이 있을까마는 창덕궁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강하게 느끼게 하는 몇 안 되는 궁이다. 창경궁과 종묘, 그리고 서울대학교병원 자리는 현재 도로가 생겨 갈라져있지만 과거 정조의 효심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역사가 깃든 장소다.

창경궁 맞은 편에는 서울대학교병원이 있다. 서울대병원의 행정동은 서울 종로구 연건동(蓮建洞)이다. 연건동이라는 지명은 한성부 동부 연화방과 건덕방의 방명에서 첫 글자를 따와 지었다고 한다. 성종 15년 창경궁을 창건하면서 풍수지리설에 의해 궁궐 동편의 지세를 보강하기 위하여 나무를 심고 담을 둘러 출입을 금하였고, 성종 24년에는 함춘원(含春苑)이란 이름이 붙여져 창경궁 후원(後苑)이 되었다. 그리고 영조 40년 사도세자의 사당인 수은묘(垂恩廟)를 창경궁의 외원 함춘원(含春苑)에 옮겨지었다.

“이제 선친께 시호를 ‘장헌(莊獻)’으로 올리고 궁은 ‘경모(景慕)’, 원(園)은 ‘영우(永祐)’로 하여 종백신(예조판서)으로 하여금 모든 의식을 그에 맞게 정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는 소자의 마음을 아버님의 영령께서 알아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숭정 이후 세 번째 병신년(1776년) 피눈물로 삼가 인(引)을 쓴다.”

240년 전 정조는 즉위하자 마자 아버지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으로, 영조가 세운 수은묘를 ‘경모궁’으로 각각 고쳤다. 그 크기가 122.5칸이었다고 하니 여러 국왕을 모신 종묘와 비교하여 위계가 더 높아 보인다. 비극적 운명을 맞은 아버지의 영혼을 조금이나마 위로해 주고픈 자식의 마음이 그만큼 컸다고 할 수 있다.

정조는 비극적인 죽음을 당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 정조는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 북쪽 담장을 헐고 월근문(月覲門)을 만들었고, 마주보는 곳에는 일첨문(日瞻門)을 만들었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정조는 “이 문을 거쳐 한 달 혹은 한 달 걸러 한 번씩 전배하러 다니며, 어린아이가 어버이를 그리워하는 것 같은 내 슬픔을 풀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정조는 월근문을 나와 경모궁으로 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할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하고 쓸쓸히 누워 계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얼마나 가슴 아파했을까.

한(恨)이 많은 군주는 성군이 되기 어렵다. 그 한으로 인해 좋은 정치를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조는 한을 품었어도 바른 정치를 펼치고자 했다. 아버지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가진 화성을 건설하여 자신의 원대한 구상을 위한 도시를 만들었다. 그리고 방대한 저술을 남긴 성군(聖君)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학문 뿐만 아니라 글씨와 그림에도 능했으며, 그 어느 왕보다도 학문적 업적을 많이 남겼다. 아버지에 대한 한을 학문으로 치유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정조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사도세자의 사당 경모궁은 지금 남아있지 않다. 1924년 경모궁 자리에 경성제국대 의학부가 들어서면서 경모궁의 일부 건물을 빼고는 본모습을 잃었다. 나머지 건물마저 6·25전쟁 때 불타 지금은 석단과 함춘문만 남아 그 역사를 느낄 뿐이다. 발굴 공사한다고 펜스가 쳐져 있지만 발굴은 지지부진하여 그저 여느 공사장을 보는 듯해 쓸쓸하기만 했다.

작년 서울대병원 병실에서 투병생활을 하면서 월근문을 내려다보았다. 굳게 닫힌 월근문과 잡초만 무성하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경모궁 터는 세월의 무상함만 느껴지게 한다. 슬픔을 달래려 정조의 영혼이 왔다면 무척이나 마음이 아팠으리라.

오는 8월 9일은 아산 경찰교육원에서 많은 경찰 관계자분들과 함께 선친의 58주기 추모제를 지낸다. 지금까지는 가족중심으로 지인들과 함께 했지만, 이제는 선친의 이름을 딴 차일혁 홀에서 많은 후배경찰들과 함께 추모제를 지내기로 했으니 선친께서도 흐뭇하시리라 믿는다. 선친을 일찍 여윈 내 어린 시절의 슬픈 기억이 정조의 사부곡(思父曲)과 하나 되어 마음이 무거워진다.


◇차길진

[약력] (사)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사)후암미래연구소 대표, 차일혁 기념사업회 대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운영자문위원, 현 경찰박물관 운영위원, 화관문화훈장 수훈, 넥센 히어로즈 구단주 대행

[저서] 어느날 당신에게 영혼이 보이기 시작한다면, 또 하나의 전쟁, 효자동1번지, 영혼산책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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