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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과 세상만사] 37. 전설에 누를 끼치지 않겠다던 ‘가짜’

입력 : 2016-08-31 04:45:00 수정 : 2016-08-30 18:3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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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짜’로 인한 사건들은 너무 많다. 그 중 현대사를 보면 이기붕의 아들이자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 이강석을 사칭한 ‘가짜 이강석’사건이 전국을 흔들었던 가장 큰 일이 아닌가 한다. 얼굴도 모르는 젊은이에게 속아 굽신하고 온갖 향응과 아부를 했던 고위 공무원들을 보면서 ‘가짜’가 얼마나 희열을 느꼈을지 짐작이 간다. 나에게도 ‘가짜’로 인해 웃지 못 할 에피소드가 있다. 차길진이 미국에서 ‘가짜 차길진’에게 사주를 물어본 사건이었다. ‘가짜’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1979년 박대통령 서거 당시, 모 기관에 연루되었던 한 젊은 예언가가 대통령의 사망을 예언하는 바람에 망명했다는 소문이 세간에 떠들썩했었다. 그 젊은 예언가은 ‘곧 윗분께서 이 세상에서 숟가락 들 일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박대통령 서거 직후 예언이 역술인들 사이에 퍼져나가자 군부의 압력으로 예언가는 LA로 피신했다는 제법 그럴듯한 소문이었다.

당시 서울 장안동에서 살고 있던 나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 있는 내가 LA로 망명을 했다니. 게다가 망명 소문이 퍼진 뒤 오래지 않아 이번에는 그 사람이 LA에서 점을 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도대체 누가 내 행세를 하고 다니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미국에 갈 일이 없어 한동안 그냥 잊었다. 그러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미국을 방문하게 됐다. 나는 LA에 있는 ‘가짜 차길진’을 수소문했다. 그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는 데, 여전히 내 행세를 하며 교민들의 사주를 보고 있었다. 그의 사무실 앞에서 나는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10년 가까이 내 행세를 하다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평범한 역술인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품새를 보니 제법 역학 공부를 좀 한 모양이었다. 그는 내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그 앞에 사주를 내놓았다. 그랬더니 그는 내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이내 사주를 풀기 시작했다. “정해년에...” 열심히 사주를 푸는 그를 두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내일 한국으로 떠납니다. 그러니 만약 제 사주를 푸시다 뭔가 짚이시는 게 있으면 공항으로 나와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자 그는 흠칫 놀라 말을 더듬으며 “내∼일∼떠∼.나신다구요” 나는 말없이 웃고는 그 집을 나와 버렸다.

다음 날 아침 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밟으려는데 멀리서 그 역술인이 헉헉거리며 뛰어왔다. “잠깐만요! 5분만, 5분만 제게 시간을 주세요” 내가 돌아보자 그는 내 앞에서 가쁘게 숨을 쉬며 밤새 푼 사주 종이를 내보였다. “분명 당신은 보통 분이 아닙니다. 어렸을 때 부친께서 돌아가시고 갓 스물을 넘긴 나이에 이승과 저승을 오갈 정도로 큰 병을 앓으셨을 것입니다. 지금 당신은 하늘의 명(命)을 받드는 일을 하고 계신 듯싶습니다. 제 말이 맞습니까”

그 정도로 풀어낼 정도면 사이비는 아니었다. 사주로는 나를 잘 아는 듯했으나 끝까지 내가 누군지는 알아보지 못했다. “그런데 왜 저보고 공항에 나오라고 하셨는지 알 수 없어서 그 대답을 듣고자 공항에 나왔습니다” 나는 또 웃음이 나왔다. “그럼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혹시 한국에서 미국으로 망명해왔다는 영능력자를 아십니까? 당신이 하도 사주를 잘 본다기에 혹시 그 분인가 싶어서 그럽니다”

순간, 그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전설 속의 사람은 나타나지 않는 법이라고 합니다. 전설은 언제까지나 전설로 남아야지 않습니까? 오늘의 만남은 언제까지나 제 마음 속에 전설로 남을 겁니다. 저도 이제 그 전설에 누를 끼치는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말없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날 이후 그는 더 이상 내 행세를 하지 않았다. 가끔씩 후암선원으로 자신의 안부를 전해오는 그는 이제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사주를 보고 있다고 한다. 원래 남다른 능력이 있던 사람이니 이름을 바꾼다고 해서 실력이 어디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몇 년 후 미국에서 온 전화 한 통을 받고 박장대소를 하였다. “법사님, 요즘 누군가 제 행세를 하고 다니는데 골치 아파 죽겠습니다. 가짜 잡는 법 좀 가르쳐주십시오”

‘가짜’와 ‘진짜’의 구별법은 ‘진짜’를 확실하게 알면 된다. 세상에는 ‘가짜’가 너무 많아 ‘진짜’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다. LA의 그 사람도 ‘가짜 인생’을 살았던 업으로 인해 결국 자신도 당한 것이 아닌가 한다.


◇차길진

[약력] (사)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사)후암미래연구소 대표, 차일혁 기념사업회 대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운영자문위원, 현 경찰박물관 운영위원, 화관문화훈장 수훈, 넥센 히어로즈 구단주 대행

[저서] 어느날 당신에게 영혼이 보이기 시작한다면, 또 하나의 전쟁, 효자동1번지, 영혼산책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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