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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과 세상만사] 47. 숙제로 안겨진 도선국사(道詵國師)의 주장자

입력 : 2016-10-12 04:40:00 수정 : 2016-10-11 18:4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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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인연이 있다면 물건에도 인연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누군가가 나에게 매우 중요한 물건을 줄때는 더욱 그렇다. 나에게 보이지 않는 인연을 맺은 준 언론인 L씨가 그런 분이다. 국내 최초의 무가지 신문을 창간했으며, 단전호흡과 다도에도 조예가 깊은 분이었다.

지난 2008년 10월 나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아버님 유언입니다. 꼭 이 물건을 전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분의 성함을 들었을 때는 금방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못 본지가 오래되어서이다. 내가 그 분을 처음 뵌 것은 1981년으로 당시 그 분은 모 일간신문의 편집국장이었는데, 한 모임에서 내게 물었다. “1979년에 어떻게 박대통령 서거를 미리 아셨어요? 보아하니 나이도 젊으신 것 같은데....”

나는 그냥 웃으며 화제를 다른 쪽으로 넘기며 L국장에게“신문사 사장을 두 번 하시는데, 오래 하실 것 같습니다.”하고 말했다. 그러자 L국장은 “에이, 제가 그럴 일이 있나요.”하면서 덕담 정도로 생각하고 웃어 버렸다. “돈 많은 사람과 인연이 있지만 돈과는 인연이 없으시네요.”란 내말은 그리 귀담아 듣지 않는 눈치였다.

그런데 그 분도 내게 알쏭달쏭한 말을 남겼다. “젊은 사람으로서 도의 모양새를 크게 갖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불교도 아니요, 도교도 아니요, 내가 도무지 정의 할 수가 없군요. 아무튼 나중에 나와 큰 인연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분과의 만남은 그것이 전부였고, 그분의 행적은 간간이 전해 듣긴 했다.

그 후 L국장은 11년 동안 H신문사 사장이 되었고 다시 자리를 옮겨 다른 신문사의 사장도 지내셨다. 여러모로 나와 한번쯤은 사회에서 스칠 법도 했지만 재회의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2008년 9월 10일 L회장이 타개하셨다. 갑작스런 죽음이라 미쳐 가족에게 제대로 된 유언을 남기지도 못했고, 평소 고인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던 P씨가 대신 유언을 전하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고인이 당부한 물건은 다름 아닌 주장자(拄杖子)였다. 주장자는 선사(禪師)들이 좌선할 때에나 설법할 때에 가지고 있는 지팡이다. 가슴까지 오는 장정 팔뚝 굵기의 곧게 뻗은 주장자였다. 검은 옻칠이 된 한 주장자는 어찌 보면 도깨비 방망이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집 한 채를 거뜬히 떠 바칠 수 있는 묵직한 기둥 같았다. 절을 지키던 한 보살의 꿈에 도선국사가 현몽하였고, 이상하게 생각한 보살은 그날‘개태사’옛 절의 마당에서 긴 지팡이 하나를 파내었는데 그것이 바로 주장자였다.

고구려를 계승하고 새로운 통일된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도선국사는 고려 태조에게 계룡산자락에 개태사(開泰寺)를 세우라고 했다. 대규모로 창건된 개태사는 태조의 초상화를 봉안한 진전(眞殿)이 세우는 일을 시발로 왕실의 조상숭배를 통해 고려 왕실을 보호하는 특별한 기능을 담당했다. 고려 500년 왕조는 개태사에서 나고 마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선의 숭유억불정책으로 개태사는 쇄락을 거듭하다 폐사하고 절터만 남았다. 1930년에 그 터 인근에 다른 이름으로 사찰이 중창되었고, 그 후 본래 절터를 발굴과정에 L회장이 깊이 관여하였다고 한다.

도선국사의 선맥이 대대로 전한다는 뜻으로 개태사에 묻었다가 1천년 만에 세상에 나온 주장자는 잘 썩지 않는 재질에 옻칠을 해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L회장은 그 주장자에 다시 정성들여 옻칠을 입혀 오랜 시간 소중한 보물로 애지중지 보관해왔다. 그리고 우리나라 선학(禪學)의 큰 족적을 남기고 불현듯 세상을 떠난 것이다.

고인이 떠나고 그해 10월 10일, 유족이 내게 직접 그 주장자를 전해주었다. ‘왜 그 많은 후학들을 제쳐놓고 당신 최고의 보물을 내게 줄 생각을 했을까? 내가 이것으로 무엇을 하란 말인가?’ 주장자를 전달받은 자리에서 나는 만감이 교차했다. 그분이 나에게 주는 큰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커다란 숙제를 떠 앉은 것이다.

그날 이후 도선국사의 주장자는 후암선원에 모셔져있다. 선원에 오신 분들에게 나는 말한다. “원효대사가 말년에 소성거사로 환속하여 소박하게 삶을 마감하고, 선풍을 휘날리던 경허대선사가 말년에 오지로 들어가 환속하여 서당 훈장으로 이름 없이 세상을 떠난 의미를 생각해봅니다. 마음 밖에 부처 없고 부처 밖에 마음 없습니다. 주장자가 이곳에 모셔진 이유도 분명 그것이라 생각합니다.”


◇차길진

[약력] (사)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사)후암미래연구소 대표, 차일혁 기념사업회 대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운영자문위원, 현 경찰박물관 운영위원, 화관문화훈장 수훈, 넥센 히어로즈 구단주 대행

[저서] 어느날 당신에게 영혼이 보이기 시작한다면, 또 하나의 전쟁, 효자동1번지, 영혼산책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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