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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과 세상만사] 49. 중국 조선족 아리랑

입력 : 2016-10-19 04:45:00 수정 : 2016-10-18 18:4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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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아리랑은 축음기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동포들이 아픔을 달래며 부르던 아리랑을 듣고 일본인들은 노랫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면서 그 아름답고 서정적인 멜로디에 반했고, 일본 시인들은 작사를 하고 아리랑을 새롭게 창작을 하여 아리랑이 일본의 유행가로 널리 퍼졌다. 그래서 일본 아리랑 연구의 대부분이 일본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반면 중국의 아리랑은 어떠했는가. 1881년 청(淸)은 조선과의 봉금령을 해제하였고, 1900년 이후 수많은 조선인들이 국경을 넘어 중국 간도로 이주했다. 조국에서는 더 이상 살길이 없어 고향산천을 버리고 두만강, 압록강을 건넜다. 그들이 짊어지고 간 살림살이는 지게와 솥, 그리고 쪽바가지였다고 한다. 하지만 살림살이 말고도 가지고 간 것이 있었으니 바로 ‘아리랑’이었다. 힘들게 척박한 땅을 일구면서도 이주민들에게 살길을 열어준 노래였다.

간도가 조선인의 거주지가 되면서 황무지로 버려져 있던 간도 땅은 점차 농토로 바뀌었다. 이 지역에 경기도 마을, 전라도 마을, 충청도 마을 등이 생겨나면서 각 지역아리랑도 함께 들어와 중국 간도에 널리 퍼져나갔다. 중국 땅에 정착한 이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가꾸어가는 과정에 그들의 정서를 고스란히 담아 아리랑을 불렀다. 조국의 광복을 기원하며‘광복군 아리랑’을 불렀다. 중국의 아리랑은 두고 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서, 조국이 처한 비극적인 운명을 한탄하며, 타국에서의 설움을 달래기 위해 불렀다. 간도가 독립운동과 항일투쟁의 중요거점이었기에 아리랑 역시 단순한 노래로서 존재한 것이 아니었다.

1926년 10월 1일 극장 단성사에서 개봉한 영화‘아리랑’은 중국의 용정에서도 상영이 되어 간도에 새로운 터전을 만들어가던 이주민들의 가슴을 애절하게 울렸다. 그 후 아리랑은 1940년대에 중국예술무대에 처음으로 출현했고 지금은 중국조선사회를 ‘음악의 고향’‘춤의 고향’으로 승화시켰고, 위대한 민족혼의 대명사가 되어 조선족의 위상을 크게 떨치었다.

1952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임 주장인 주덕해는 유구한 우리 민족유산이 하나 둘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워 민간예술에 대한 발굴, 수집, 정리, 연구 사업을 지시했다. 이 사업은 3차에 걸쳐 진행되었고, 1978년 김봉관 선생 일행이 도문시 정암촌에서 '청주아리랑'를 채록하였다. 정암촌은 1938년 충북의 청주 인근의 농가 180여 호의 주민들이 청주역에서 만주행 열차를 타고 함경북도 온성역에 도착한 후 도보로 두만강을 건너 만주 땅으로 들어가 개척한 산골마을로, 그 서북쪽 산에 높이 서 있는 정자바위의 이름을 따서 마을이름을 정했다고 한다.

김봉관 선생은 청주아리랑을 채록하기 위해 무게 20㎏이나 되는 구형 녹음기를 들고 정암촌을 찾아가 수집하였는데, 다행히 명창에 준하는 실력을 가진 분들과 몇몇 노인들이 부른 고향의 노래를 어렵사리 녹취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잊혀졌던‘청주아리랑’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저서에서 "아리랑은 조선 반도에서 기원해 중국 땅에서 조선족들에 의해 보존, 전승, 발전의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고 했다.

지난 10월 7일 인사동 태화빌딩에서는 사단법인 한겨레아리랑연합회가 주관하는 제12회 아리랑상 시상식이 있었다. 이날 아리랑상은 김봉관 선생이 받았다. 해외동포에게 시상하는 첫 번째 아리랑상이었다. 수상자 김봉관 선생은 조선족의 전통문화를 지켜온 민속학자이자 민요연구가로서, 1978년부터 수년간 동북 3성 등 조선족 마을을 찾아다니며 각 지역에서 불리는 아리랑을 채집해 악보로 정리한 공로를 인정받아 제12회 아리랑상을 수상하였다.

조선족 민요에 관해 연구하고 책을 집필하느라 시력이 나빠진 김봉관 선생은“나는 민요를 애창하는 일반 평민일 뿐인데 아리랑상을 주셔서 부끄럽습니다. 지금 조선족 인구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신세대는 우리 고유의 민요를 알지 못합니다.”라며 중국에 동화되고 있는 조선족의 현실을 아쉬워하며 살아있는 동안은 아리랑 연구를 계속하겠다고 했다.

2011년 5월 중국 국무원은 아리랑을 국가급무형문화재로 발표했다. 국내외적으로 중국을 향해 비난의 목소리가 나왔지만 아마도 이것이 조선족 아리랑의 현실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대명사입니다. 조선족들은 아리랑으로 마음이 다 통합니다."라고 말한 김봉관 선생의 말처럼 아리랑은 전 세계에 흩어져있는 한민족의 마음을 하나로 만드는 통일의 매개체인 것만은 분명하다.


◇차길진

[약력] (사)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사)후암미래연구소 대표, 차일혁 기념사업회 대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운영자문위원, 현 경찰박물관 운영위원, 화관문화훈장 수훈, 넥센 히어로즈 구단주 대행

[저서] 어느날 당신에게 영혼이 보이기 시작한다면, 또 하나의 전쟁, 효자동1번지, 영혼산책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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