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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과 세상만사] 52. 밥 딜런에게 인용(引用)이란

입력 : 2016-10-31 04:40:00 수정 : 2016-10-30 18: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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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화가 중 한 사람인 단원 김홍도의 그림 ‘주상관매도(舟上觀梅圖)’에는 멋진 시 한 구절이 있다. 그림 속 절벽 옆에 쓰여 있는 노년화이무중간(老年花似霧中看), 즉 ‘늙은 나이에 보이는 꽃은 안개 속을 보는 듯하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이 시는 김홍도의 시가 아니다. 중국의 시성 두보(杜甫)가 죽던 해에 쓴 시의 구절을 따온 것이다. 이 시를 보는 사람은 아무도 화가 김홍도가 중국의 시성인 두보(杜甫)의 시를 베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는 한시(漢詩)의 수사법 중 ‘점화(點化)’ 기법으로 다른 사람의 시문을 적절히 빌려와 자기화를 시키지만 절대로 자신의 작품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당대 시인들은 두보의 작품이라면 거의 외우다시피할 정도였는데 한시에 능했던 김홍도가 이를 모를 리 없지 않겠는가. 김홍도 역시 두보가 죽던 해 썼던 이 시를 깊이 이해하면서 절벽 위에 핀 매화를 바라보는 노인의 심정을 그림과 시를 통해 표현하고 싶었으리라.

시화일률(詩畫一律)이라는 말이 있다. 시와 그림의 창작이 동일한 생각에서 이뤄지며, 같은 경지에서 이르면 높은 가치를 지닌다는 뜻이다. 고려 때 이인로(李仁老)는 “시와 그림이 오묘함에서 서로 근원이 같아 일률이라 하고 옛사람은 그림을 소리 없는 시, 시를 소리 있는 그림이라 했으니, 물상을 옮겨 내는데 하늘의 창생적 기밀로 하는 술법이 서로 같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런 생각들은 고려 중기를 지나 조선 후기까지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림 속의 시는 작품을 표현하는 하나의 구성요소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그림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시라면 굳이 자기 시가 아니어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리고 그림을 보면 누구 시인지를 알 수가 있었다.

예전에 모 사이트에 내가 썼던 글이 올라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내 글을 정리해 마치 자신이 창조해낸 글인 것처럼 올려놓았던 것이다. 이를 발견한 분이 글을 보여주며 강력하게 항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나는 “아는 사람은 다 아는데 이런 문제로 시끄럽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늘에 맡기면 자연스럽게 해결되게 되어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나에게 이런 일들은 자주 있는 일이다. 한 번은 미국에 있을 때 지인이 내 시가 마음에 든다며 한 편 달라기에 주었더니 몇 년 후 그 시가 대중가요 가사가 되어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작사가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 이름으로 말이다.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기분이 묘했다.

방송국과 영화 관련 일을 하는 30대 작가가 찾아온 적도 있었다. “제가 이번에 쓴 시나리오에 선생님의 아이디어를 허락 없이 인용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 말과 함께 시나리오를 내 앞에 내밀었다. 만약 내가 삭제를 원하면 고치겠다는 것이었다. 막상 그렇게 사과부터 하니 오히려 내가 어찌나 고맙던지 시종 웃으면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괜찮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마시고 내 글보다 더 좋은 영상을 만드세요.” 그리고 이것저것 아이디어가 될 만한 것을 제공했다. 그 덕분에 시나리오의 많은 부분이 수정됐고 전작보다 뛰어난 작품이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201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밥 딜런이 수상과 관련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그가 과거에 창작물을 표절했다는 의혹들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 13일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기사에서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비판하는 이들은 그가 습관적으로 타인의 표현을 빌려와 자신에게 맞게 사용하곤 했다”고 지적했다. 문학성을 인정받은 밥 딜런의 노래 가사가 순수한 창작물이 아니라는 얘기다. 밥 딜런에 대한 표절 시비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으며 끊임없이 표절시비에 휘말려왔다.

이에 대해 밥 딜런은 2012년 “인용은 포크와 재즈를 더욱 풍요롭게 하는 오랜 전통이다. 멜로디와 리듬이 더해진다면 무엇이든 당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한다”고 말했다. 밥 딜런이 인용이라 했으니 결국 일부 차용(借用)했음을 인정한 것이다.

김홍도의 그림이 시(詩)와 어울려 깊은 이해와 새로운 미를 창조했듯이 밥 딜런 또한 가사와 음악이 하나 되어 세인들의 가슴에 강한 감동을 준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노벨문학상도 수상하게 된 것 아니겠는가. 다만 노벨상을 수상하고도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이 가사의 인용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차길진

[약력] (사)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사)후암미래연구소 대표, 차일혁 기념사업회 대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운영자문위원, 현 경찰박물관 운영위원, 화관문화훈장 수훈, 넥센 히어로즈 구단주 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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