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다음

입력 2017-06-21 04:40:00, 수정 2017-06-21 04:40:00

[차길진과 세상만사] 115. 미리 알면 그 시간만큼 더 슬프다

  • 어머니는 간암으로 투병 중이셨고, 어머니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었던 나는 도저히 운명하시는 모습을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병상에 누워계신 어머니를 만나 손을 꼭 잡아드렸다. “어머니, 20분 동안만 아프시면 됩니다.” 어머니는 그 말의 뜻을 알고 계셨을까. 그저 “미국 잘 다녀오세요”라고 말씀하시며 엷은 미소를 지어 보이셨다. 그렇게 어머니는 약 20분 동안만 숨쉬길 힘들어하시더니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며칠 전은 나에게는 최초의 종교와도 같은 어머니의 기일이었다. 지인들과 조용히 제사를 올려 들렸다.

    지난 1985년의 일이다. 30대 후반의 여인이 부친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걱정이라며 고민을 털어놨다. 그녀는 무남독녀 외동딸로서 깊은 수심에 잠겨있는데 어디선가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놀라 두리번거렸지만 거기엔 나와 그녀 단 둘뿐이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그녀의 부친.

    병원에 입원 중이라는 부친의 생령이 그녀와 함께 온 것이었다. “나는 한 달 후에 떠납니다. 하지만 내 딸은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이 사실을 딸에게 알려 주십시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아버님 병명을 아십니까?” 그러자 여인은 “늑막염입니다”라고 했다.

    나는 한 달 뒤에 세상을 떠날 병이 ‘늑막염’일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분명 병원에서 오진을 했던 것 같다. “잘 들으십시오. 아버님의 병은 늑막염이 아닙니다. 약 한 달 뒤에 부친이 떠나실 것 같으니 그동안 감정을 잘 정리하시고 특히 법적인 상속문제를 잘 마무리 짓길 바랍니다.” 여인은 매우 당황스러워했다. 병원에서 큰 병이 아니라고 했다면서 반신반의했지만 내 말을 듣고 부친과 남은 시간 좋은 추억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는 한 달 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부친은 떠났다. 장례를 끝낸 뒤 여인은 만약 그때 내가 언제 떠나신다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제야 나는 부친 영가의 목소리를 들었던 사실을 말해줬다. 물론 믿기 힘든 일이었다. 어떻게 살아 있는 사람의 영혼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의 명이 다할 무렵에는 혼이 약간 뜹니다. 이때 평상시 모습과는 다른 행동을 하곤 합니다. 바로 혼이 왔다 갔다 하기 때문입니다. 저를 찾아왔을 때 이미 부친 영가도 함께 오셨습니다.” 이에 여인은 무척 놀라워하다 죽음을 목전에 둔 부친이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에 영혼이 되어 찾아왔다는 사실에 감동했다. 그녀는 “우리 아버지 떠나시는 날도 아셨으니 내가 떠날 때도 꼭 미리 알려 달라”며 농담을 해 나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육체는 생령의 음직임을 알지 못한다. 물론 영적으로 발달한 사람들은 미리 할 수 있지만 이런 일은 흔하지 않다. 생령도 영혼이기에 인간이 알 수 없는 미래의 일을 예견한다. 간혹 시한부 환자가 “언제쯤 죽을 것이다”라고 말한 뒤 그 때쯤 숨을 거두는 일이 있는데 모두 생령의 예지력 때문. 장모님도 돌아가시기 전 영가로 자주 내 앞에 나타나곤 했다.

    2003년 11월 미국에 있었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수 십 년 동안 지병으로 고생하시던 장모님이 영가로 나타나서 ‘이제 떠날 때가 된 것 같다’는 말씀을 하고 돌아서기를 여러 번. 불안한 마음에 가족들에게 이 사실을 미리 알려줬지만 ‘설마’ 하는 마음으로 반신반의했다. 돌아가시기 전 날, 장모님은 평소보다 식사도 잘 하셨고 또렷한 눈빛으로 가족들을 찬찬히 훑어보시고는 아주 잠깐 동안 죽음의 고비를 넘어 편안히 세상을 떠났다.

    사람의 운명을 미리 안다는 것은 마음의 준비와 정리할 시간이 있어 좋을 것 같지만 그래도 슬픈 마음은 어찌 할 수가 없다. 특히 가족일 때는 더욱 그렇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꿈을 꾼다고 생각하세요”라고 하며 손을 잡아주는 것이 고작일 때가 많다. 장모님께서 머나먼 여행을 떠나던 날, 나는 장인어른 영가를 뵐 수 있었다. 그동안 잘 해줘서 고맙다며 이제는 당신이 데려간다는 장인어른 말씀에 고개 숙인 채 아무 말씀도 드리지 못했다. 미리 아는 만큼 슬픔도 그 시간만큼 더 한 것 아니겠는가. (hooam.com/ whoiamtv.kr)


    ◇차길진

    [약력] (사)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사)후암미래연구소 대표, 차일혁 기념사업회 대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운영자문위원, 현 경찰박물관 운영위원, 화관문화훈장 수훈, 넥센 히어로즈 구단주 대행

    [저서] 어느날 당신에게 영혼이 보이기 시작한다면, 또 하나의 전쟁, 효자동1번지, 영혼산책 등 다수

HOT레드

  • 오늘의 파워링크
  • Today 정보
  • 이시각 관심뉴스
  • Today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