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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과 세상만사] 192. 비워야 얻을 수 있다

입력 : 2018-03-27 18:38:22 수정 : 2018-03-27 18:3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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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에는 진공묘유(眞空妙有)란 말이 있다. 말 그대로 ‘진공(眞空) 그대로에 묘한 진리가 있다’는 뜻인데, 쉽게 말하면 비어있어 큰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이해해도 될 것이다. 비움에 대한 철학은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하고, 수십 년 동안 해온 구명시식 역시 마찬가지다. 구명시식에서 오랫동안 전생에서 이어진 껄끄러운 악연을 풀어낸 사람들도 진공묘유(眞空妙有)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구명시식을 통해 원하는 바를 얻은 사람들은 전국 유명사찰의 큰 스님을 뵈었다며 찾아온 불자들보다 자그마한 동네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기독교 신자인 경우가 더 많았다. 그것은 아마도 한 마음으로 다가갔기 때문일 것이다.

즉, 많은 지식을 안고 오시는 분들은 그 지식에 가려 절실하고 애절한 마음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마음이 없으면 진정한 바람이 전해지지 않는다. 독실한 신앙보다 한쪽으로 치우지지 않은 종교인이야말로 큰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언젠가의 일이다. 종교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한 여성이 구명시식에 임하게 되었다. 나는 내심 걱정이 앞섰다. 혹 지식에 가려 구명시식 중 실수를 하시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요모조모 따지다가 영가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하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녀가 갑자기 내게 “법사님, 번지수가 틀렸습니다!”라며 이의를 제기하였다. 나는 잘못 들었나 싶어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라고 되물었다. 그랬더니 그녀는 종이에 적힌 자신의 주소 번지수가 틀렸다며 숫자를 정정해 달라는 것이었다. 순간 한숨이 나왔다. 영가가 어찌 한낱 종이쪽지에 적힌 주소를 보고 찾아오겠는가. 종이에 적힌 숫자는 우리 인간 세상에서나 필요한 것이지 영계에서는 아무 소용없는 것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기는 동사무소가 아닙니다. 번지수가 잘못되었다고 영가께서 못 찾아오시겠습니까? 구명시식 자리는 바로 영계인 것입니다. 이곳을 사람 사는 세상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실 그녀가 초청한 영가들은 이미 선원에 자리하고 앉아계신 지 오래다. 그럼에도 그녀는 번지수가 틀렸다며 따졌으니 영가들이 얼마나 민망했겠는가. 한낱 번지수에 연연한다면 영가들의 한을 제대로 풀어줄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번지수와 같은 지식이 아닌 마음 하나 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비움의 지혜가 아닌가 한다.

내가 미국에 있을 때 A씨가 찾아와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녀는 돌아가신 시댁의 숙부와 숙모가 후손이 없어 제사 대신 차례상으로 모시고 있었다. 숙부는 6·25 전쟁 중에 전사하였고 전사통지서를 받은 숙모는 충격으로 그 자리에서 쓰러진 뒤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A씨는 그동안 두 분을 생각하며 차례를 지성으로 챙겼지만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숙부의 이름은 친척들을 통해 알았지만 숙모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결혼하자마자 숙부는 전쟁터에 나갔고 전쟁 중이라 혼인신고도 못했으니 말이다. 그런 이유로 구명시식을 통해 알 수는 없는지 상담을 청했다.구명시식에 나타난 숙부와 숙모영가는 손이 끊겨 제사상을 못 받을 줄 알았다며 A씨에게 무척 고마워했다. 숙모영가는 지금까지 자신의 이름을 몰라 고생했던 것을 다 알고 있다며 이름을 가르쳐주었다. A씨의 한결같은 마음이 영가와 통한 것이다.

“무념무상이어야 합니다. 세상만사가 비우지 않으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없습니다”라는 내 말에 A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식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보이는 부분만 알 수 있다. 하지만 다차원적인 보이지 않는 세계는 텅 빈 마음, 즉 진공묘유(眞空妙有)의 마음으로 다가가야 제대로 알 수가 있는 것이다.

(hooam.com/ whoiamtv.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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