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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과 세상만사] 194. 잘 죽는다는 것

입력 : 2018-04-03 18:29:06 수정 : 2018-04-03 18:2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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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저생활의 다양화로 등산과 낚시에 관한 TV프로가 자주 방송되고 있다. 초보 연예인 조사(釣士)들의 좌충우돌하는 모습이 재미를 자아낸다. 낚싯대를 드리우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S씨는 칼럼리스트, 정치 평론가, 그리고 견지낚시의 대가로서 풍류를 즐길 줄 알았던 사람이다.

2001년 겨울로 기억한다. 잠시 뉴욕에 있을 때 모 시사 월간지에 실린 그의 글을 읽고는 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잘 살진 못했지만, 잘 죽고 싶다’는 그의 마지막 칼럼이었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뒤 죽음을 기다리며 쓴 글 속에는 나와의 오랜 인연이 녹아 있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팔당호에서 수중 고혼제를 지내려던 무렵이었다. 8월 8일, 8이 겹치는 그 날 수중 고혼제를 지내기로 지방 신문에 기사가 나갔으나 나라에 큰 일이 생길 것 같아 나는 서둘러 S씨에게 “수중 고혼제를 연기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이미 날짜를 정해 알렸으니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어차피 올리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 무렵 동해안에서 북한 잠수함 침투사건이 발생하여 결국 수중 고혼제는 미루어지고 말았다.

그 일이 있은 뒤 S씨와 막역한 사이가 되어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됐다. 강원도 부근에 도착했을 때 나는 좋은 배경이 있어 그에게 “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자 그는 웃으면서 “다른 사람 사진은 많이 찍어주었는데 정작 제 사진은 없었습니다”라며 카메라를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마치 정성스럽게 선물을 포장하듯 그를 향해 셔터를 눌렀다. 그런데 여행이 끝난 뒤 그는 내가 찍어주었던 사진을 들고는 급하게 나를 찾았다. “법사님, 사진이 이상합니다.” 내가 찍은 사진인지라 그럴 리 없다 생각하면서도 사진을 받아보고는 나도 놀라고 말았다. 그의 얼굴이 빛바랜 사진처럼 하얗게 변해 있었다.

순간 이상한 느낌은 들었지만, “빛이 투과된 거겠죠”라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사진 전문가였던 그는 “이 각도에서는 빛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마치 영가가 내 얼굴을 감싸고 있는 것 같습니다”라며 불안해했다. 사진에서 이상한 감을 느꼈는지 그가 내게 추궁을 하는 통에 나는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아마 앞으로 3년을 살기 어려우실 것 같습니다. 담배도 끊고 술도 끊으십시오.” 내 말에 그는 눈을 크게 뜨며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라며 되물었다. 나는 순간 아니다 싶어 “아닙니다, 담배 끊고 술을 끊는다고 정해진 일이 바뀌겠습니까? 이미 정해진 운명이니 남은 시간 동안 재미있게 사십시오”라고 했다. “그 말씀 혹시 저를 저주하려고 하시는 것은 아니죠?” 그는 당황하면서도 끝까지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그런 그에게 나는 이 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저 제 선물이라 생각하시고 사진을 잘 간직해 주십시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알고 살아간다는 것만큼 큰 선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3년이 지나 S씨는 세상을 떠났다. “법사님 예언이 맞았습니다. 이미 명이 정해져 있었던 것입니까?” 죽는 순간까지 기자 정신을 잃지 않았던 S씨. 힘들게 숨을 내쉬는 그에게 나는 말했다. “누구보다 잘 죽을 수 있습니다. 소원대로 될 터이니 큰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비록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는 재미있게 살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잘 죽기를 바랐다.

인간이 잘 살기 바라는 것은 결국 웰 다잉(Well-Dying), 즉 잘 죽기 위함이 아닌가 한다. 후회 없이 살다 갈 수만 있다면 잘 죽는 것 아니겠는가. S씨도 3년의 시간 동안 잘 죽기 위해 노력했어도 후회가 남는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 걸보면 인간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후회 없는 마무리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닌 것이다.

(hooam.com/ whoiamtv.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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