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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줌마 라라의 일기] 15화. 무임승차하지 마

입력 : 2016-04-27 04:45:00 수정 : 2016-04-26 18:4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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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도로 물릴 것도 아니면서 우린 툭하면 길고 짧은 걸 대보느라 바빴다. 내가 네게 넘치느니, 내가 한참 밑지느니, 치부책을 수시로 꺼내 ‘이미 물 건너가 버린 계산’이 맞나 틀리나 두드려보는 것이었다.

유전자 싸움이 시작되었다. “누굴 닮아 코가 낮을까?” 우대리가 아이와 내 코를 번갈아 보며 씨익 웃는다. “수령턱살은 어쩔 건데? 견적 꽤나 나오겠어” 나는 우대리의 약점인 두둑한 턱살을 물어뜯었다. 2차전은 대개 공부머리로 이어진다. “그 집은 기껏해야 전교 1등이지?” 우대리가 슬슬 약 올리며 자긴 ‘전국 1등’이라며 근거 없는 자랑질을 해댄다. “대체 몇 명이 봤는데 전국 1등이래? 두 명?”하며 나의 펀치가 또 날아가는 식이다.

상대방의 페이스에 휘말리거나 발끈하면 지는 것이다. 유독 우대리가 발끈하는 게 있었으니 다리가 짧단 말이었다. ‘키는 작아도 비례로 보면 환상적인 롱다리’라나 뭐라나. 자기 평생 ‘숏다리란 모욕은 들어본 적 없다’며 거울 앞에서 짧은 다리를 뽐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난 결정적 증거를 확보했다. 세탁소에 맡긴 남편의 청바지가 내 것보다 5㎝ 이상 짧은 걸 발견하고 만 것이다. 허걱, 이럴 줄이야. 난 곧장 집으로 헐레벌떡 달려와 우대리에게 “이걸 어쩌지? 숏다리씨, 검증돼 버렸네”라며 청바지를 면상에 들이대었다. 아, 그때의 통쾌한 기분이란 ‘우후훗’ 역시 길고 짧은 건 대봐야 하는 것이다.

여행 가는 날엔 ‘무임승차 논란’에 휩싸였다. 짐 싸기에서 숙소, 지도, 맛집까지 풀코스로 준비했으면 뭐라도 하는 시늉을 해야 할 게 아닌가. 모든 준비가 끝나자 그제야 우대리는 이불 속에서 부스스 까치집 머리로 일어나 차에 오르는 거였다. “내 인생에 너무 무임승차하는 거 아니야? 내 게딱지에 밥 좀 그만 비벼 먹지”라고 쏘아붙이자 우대리는 “저번 영화는 누가 날로 먹었는데”라며 날로 먹은 내 과거를 캐내는 것이었다. 우린 무임승차 하지 말란 말이 너무 재미있어서 그날 격렬히 싸우다 깔깔 웃었던 기억이 난다.

싸움에 이력이 붙으면서 ‘떠버리’ 우대리의 말문을 막아버리는 치명적인 약점을 손에 쥐게 되었으니 그건 가문의 내력을 묻는 거였다. 친할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알려줄 어르신이 없었던 그는 “어디 우씨 어느 파 몇 대손이야?”를 물어보면 오메 기죽어 모처럼 입을 함구했다. 난 그의 면전에서 ‘청강공파 16대손이며, 시조 할아버지는 누구’등등을 보란 듯이 쫘악 읊어대는 것이었다.

상대에게 잡힌 약점이 늘어날수록 우린 만만한 사이가 되어갔다. 연애할 때 콩깍지가 하나씩 벗겨졌고 서로의 누추한 맨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는 세상에서 유일한, 나의 하잘 것 없는 사람이 되어갔다. 틈만 나면 으르렁거리는 순간에도 우린 알고 있었다. 냉혹한 이 세상에서 마음껏 무임승차할 수 있고, 서로의 게딱지에 밥을 비벼먹을 수 있는 유일한 ‘내 편’이 부부밖에는 없다는 것을. 그리하여 나의 하잘 것 없고 누추한 그는 내게 하나뿐인 고귀한 사람이 되어갔다. (다음 편에 계속)

김라라 / 식품기업 R사 마케팅팀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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