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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7-05-17 17:26:53, 수정 2017-05-17 17:26:53

강남역 살인 사건 후 1년… "변했지만 변하지 않았다"

  • “변했지만 변하지 않았다.”

    서울 지하철 강남역 인근의 한 남녀 공용 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목숨을 잃은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이 발생한 지 꼭 1년이 흐른 17일. 그간 한국 사회의 변화에 대한 시민들 의견을 종합하면 이 한마디로 요약된다. 여성 폭력과 혐오 문제를 둘러싼 인식은 사회 전반적으로 개선됐지만 ‘여성이 안전한 나라’가 되려면 갈 길이 멀다는 지적이다.

    지난 1년간 두드러진 변화는 20∼30대 여성들이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 혐오 등 여성 문제에 관심을 갖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강남역 사건은 여성인 나에게도 있을 수 있는 일’이란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지난달 대법원에서 징역 3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범인 김모(35)씨는 경찰 수사와 재판을 받으며 “여성에게 자꾸 무시를 당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반복적으로 진술했다.

    직장인 임모(30·여)씨는 “일각에서 강남역 사건을 조현병 환자에 의한 ‘묻지마 살인’이라고 포장하는데 이 사건은 엄연한 여성 혐오 범죄”라며 “주변에서 누군가 여성을 비하하거나 차별하는 말을 하면 가만히 있지 않고 적극 반박한다”고 말했다. 대학생 허모(24·여)씨는 “강남역 사건을 보고 충격을 받아 학내 페미니스트 모임에 가입해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인권 감수성이 높아진 남성도 적지 않다. 직장인 김모(33)씨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글을 쓰거나 말을 하기 전에 성차별적 표현이 아닌지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고 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 김영순 공동 대표는 “강남역 사건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 여성 혐오에 대한 일종의 집단적인 각성이 이뤄졌다”며 “특히 온라인상에서 활동하던 젊은 페미니스트들이 거리로 나와 일상 속 여성 혐오를 고발하는 행동에 나선 게 가장 큰 변화”라고 지적했다.

    다만 여성 안전이 담보되지 않는 사회 구조적 문제는 달라진 게 없다는 게 중론이다. 한국여성민우회가 지난 15일부터 온라인상에서 벌이고 있는 캠페인 ‘강남역 1주기,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을 보면 참가자 대부분이 “변한 건 나, 변하지 않은 건 사회”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한 여성은 트위터에 “술을 한 잔 해 카카오택시를 타고 집에 늦게 갈 때면 여전히 (주변 사람에게 택시를 탄 시간과 장소, 택시 번호를 카카오톡 메시지로 알려주는) 안심 메시지 기능을 이용한다”고 썼다.

    전문가들도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 원인과 대책을 둘러싼 논의가 한때 뜨거웠지만 여성 안전을 위한 실질적인 제도 개선으로 이어지진 않았다고 입을 모은다. 김 대표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여전히 밤길이 무섭고 폭력적 상황에 움츠러든다”며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보진 않지만 여성의 이런 두려움과 불안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에 따른 근원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꼬집었다.

    이 때문에 일명 ‘젠더 폭력(성별 차이에 기반을 둔 폭력으로, 통상 여성에 대한 폭력) 방지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장미혜 여성권익·안전연구실장은 “(가정폭력처벌법, 성폭력처벌법 등) 현행법상 여성에 대한 폭력은 가정폭력·성매매·성폭력·성희롱으로만 규정돼 있고 관련 법도 따로 있다”며 “미국 여성폭력대응법(VAWA)처럼 데이트 폭력이나 스토킹 등 여성 폭력 전반에 대한 대응을 광범위하게 포괄하는 통합적인 법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1994년 제정된 VAWA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각종 폭력에 대한 미국의 대응 정책이 담겨 있는 법으로 평가 받는다.

    장 실장은 이어 “여성폭력방지센터를 만드는 등 여성가족부가 젠더 폭력에 실질적으로 대응하는 체계를 갖출 수 있도록 조직적인 기반도 구축해야 한다”며 “인권 감수성, 폭력 예방에 대한 시민 교육도 어릴 적부터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특히 “폭력은 금방 줄지 않는다”며 젠더 폭력 예방을 위해 정부의 장기적인 투자와 꾸준한 점검을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문재인 대통령의 젠더 폭력 예방 공약에 관심이 모아진다. 문 대통령은 대선 당시 “여성이 안전한 나라, 성평등한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며 △젠더 폭력 방지 기본법 제정 추진 △성희롱·성매매·성폭력·가정폭력 예방 교육 내실화 등 전문가들의 정책 제언과 궤를 같이하는 공약들을 제시한 바 있다. 문 대통령은 또 여가부 기능을 강화하고 대통령 직속 성평등위원회를 꾸리겠다고도 밝혔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강남역 사건의 원인 분석에 맞는 대책을 보완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승재현 연구위원은 “범죄가 발생하면 재발을 어떻게 막을지가 중요한데 그러려면 그 범죄의 원인을 파악해야 하고, 강남역 사건의 경우에는 조현병 환자, 남녀 공용 화장실로 결론 났다”며 “오는 30일 정신보건법 개정안이 시행되면 정신 질환자 1만명 정도가 시설에서 퇴원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들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치료 처우 조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개정안은 환자의 자기 결정권과 인권 보장을 위해 정신 질환 악화 여부, 자해·타해 가능성이란 요건을 모두 충족해야 강제 입원을 할 수 있게 하는 게 핵심이다.

    승 연구위원은 또 “화장실의 문제점이 여전히 존재한다”며 “남녀 공용 화장실은 물론, 여성 화장실에도 비상벨을 두고 폐쇄회로(CC)TV 설치 등으로 셉티드(CEPTED·범죄예방디자인)를 구현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날 전국 곳곳에서는 희생자를 기리는 다양한 행사가 진행됐다. 여성·인권·시민 단체 55개로 구성된 ‘5·17 강남역을 기억하는 하루 행동’은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묵념한 뒤 기자회견을 열고 “젠더 폭력으로 희생된 여성들을 잊지 않을 것”이라며 “그 본질인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 멈추는 날까지 싸움을 계속하겠다”고 천명했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신촌 등지에서 침묵 퍼포먼스를 이어갔다. 연세대 페미니스트 네트워크인 Y-FL은 신촌 캠퍼스에서 ‘여성 혐오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를 개최했으며, 대구와 부산 등지에서도 저녁에 추모 문화제가 열린다.

    세계일보 박진영 기자 jy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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