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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29일의 비밀'… 알고도 못 막은 인재

입력 : 2017-09-02 05:20:00 수정 : 2017-09-02 16:3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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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월드=권영준 기자] 지난 8월29일 서울월드컵경기장. 신태용(47)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대표팀은 31일 이란전을 이틀 앞두고 적응 훈련에 나섰다. 이날 훈련은 철통 보안 속에 진행됐다. 15분 공개 후 전면 비공개로 전환했고, 경기장 곳곳에 안전요원을 배치해 취재진의 접근을 막았다.

이날 취재진은 대부분 대표팀이 공개한 초반 15분의 시간에 잔디 상태를 확인했다. 그러나 진짜 잔디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대표팀 훈련이 끝난 이후였다. 스포츠월드 취재진은 대표팀이 훈련을 마치고 파주 NFC로 이동한 뒤 잔디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그라운드로 향했다. 현장은 예상보다 심각했다. 그라운드로 나가기도 전에 심각성이 느껴졌다. 선수 라커룸에서 그라운드로 향하는 통로 곳곳에 잔디 덩어리가 송두리째 뽑혀 나와 널브러져 있었다. 라커룸 안은 더 심각했다. 대표팀이 떠난 적막한 라커룸은 잔디 덩어리만이 홀로 지키고 있었다.

중요한 점은 단순히 잔디 상태가 안 좋다는 사실 확인이 아니다. 어떻게 안 좋은지 정확하게 판단하고, 이에 대비책을 세웠어야 한다. 서울월드컵경기장의 잔디는 잔디 자체가 나쁘다기보다는 급하게 잔디를 심어 넣은 보수 공사로 진행하다 보니, 잔디가 축구화에 찍혀 들린다는 점이었다.

서울시설관리공단이 야속하긴 하지만, 이는 한국 스포츠의 현실이다. 당장 바뀌어야 할 사안이 분명하지만, 당장 바뀌지도 않을 사안이기도 하다. 손흥민의 말대로 이런 상황에서 좋은 성적을 내라는 것은 분명 화가 나는 일이다.

그러나 이를 탓하고, 핑곗거리로만 내세운다면 서울시설관리공단이나 대표팀이나 다를바 없다. 이런 현실에서 최적의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이란전도 마찬가지다. 잔디가 심하게 들리는 상황에서 많은 양의 물을 뿌리면, 잔디가 젖은 상태에서 들리게 마련이고, 잔디를 잡아주는 흙들이 축구화에 박힌다. 이 경우 당연히 선수들의 기동성이 떨어지고, 방향 전환이 힘들어진다. 체력 소모도 많아진다. 신 감독은 “이란 선수단은 이러한 잔디를 극복하는 힘이 있지만, 한국 선수는 아니다”라고 했다. 틀린 말이 아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차라리 물을 많이 뿌리지 않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었다. 홈에서 열리는 경기이기 때문에 충분히 변경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현재 대표팀이 빠르고 정확한 패스를 바탕으로 한 전술에 취약하기 때문에 굳이 많은 양의 물을 뿌리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다. 홈의 이점을 오히려 이란의 이점으로 만들어준 꼴이 됐다.

이날 취재 과정에서 또 한 가지 사실을 확인했다. 바로 이란전 베스트 11이다. 신 감독은 이란전을 이틀 앞둔 이 날 훈련에서 이미 베스트11을 결정했다. 이날 철통 보안 속에 훈련을 진행한 이유였다. 이날 주전조와 비주전조로 나눠 전술훈련을 진행했는데, 주전조로 나선 11명의 선수는 이란전에서 그대로 선발 출전했다.

두 번째 의문은 바로 공격 전술이다. 신 감독은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공격진은 개인 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해서 베스트 11을 구성했다”고 밝혔다. 실제 이날 공격수로 나선 황희찬(잘츠부르크) 손흥민(토트넘) 권창훈(디종) 등은 한국 선수 가운데 손꼽히는 테크니션이다. 그러나 최악의 잔디 상태에서는 개인 능력은 무용지물이었다. 손흥민의 경우 특유의 폭발적인 스피드를 살리지 못했고, 황희찬 역시 저돌적인 공간 침투를 보여주지 못했다. 권창훈도 정확한 킥을 극대화하지 못했다. 더욱이 황희찬은 무릎이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잔디가 최악의 상태였다면, 무릎이 좋지 않은 황희찬을 굳이 선발로 내세워야 했는지 의문이 남는다. 선발 명단을 두고 개인 능력과 조직력 사이에서 한 번 즈음은 더 고민해볼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염기훈(수원) 이동국(전북) 이근호(강원) 남태희(알 두하일) 등은 조기소집 훈련을 첫날부터 소화했기 때문에 오히려 이들의 조직력이 최악인 잔디 상태에서는 더 효과적일 수 있었다.

대한축구협회의 지원 업무도 아쉬움이 남는다. 이날 6만 관중 동원은 대한축구협회 관계자들의 노력이 큰 영향을 미쳤다. 경기 홍보에 어느 때보다 적극적이었고, 붉은색 티셔츠를 나눠주는 이벤트를 진행해 관심도를 높였다. 그들의 노고는 충분히 박수받을 일이다. 다만 이들은 한 수 앞을 더 내다 봤어야 한다.

이날 6만이 넘는 관중이 들어찬다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이날 경기장은 찾은 6만3124명의 관중은 역대 A매치 홈경기 관중 순위 9위에 해당한다. 짚어볼 점은 최다관중 10위권 내에 2010년 이후 관중 기록은 2013년10월12일 브라질과의 평가전이 유일하다. 대부분 기록이 2001~2006년 A매치에서 형성됐다.

즉, 대표팀 선수단은 6만이라는 홈 관중 속에 경기한 경험이 풍부하지 않다고 풀이할 수 있다. A대표팀 첫 지휘봉을 잡은 신 감독이나, 베스트 11으로 나선 대부분의 선수는 6만 홈 관중의 환경이 낯설 수밖에 없다. 당연히 그라운드 안에서 소통이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예상이 가능한 부분이었다. 반면 이란은 홈에서 항상 10만 관중의 환경 속에서 축구를 해왔다. 붉은 물결이 6만이라도 그들에게 낯선 환경은 아니었다. 케이로스 이란 감독이 "한국 축구팬이 많이 찾아와 주셔서 좋은 분위기에서 경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며 "한국 팬에 고맙다"라고 내던진 조롱섞인 인사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패착은 오랫동안 한국 축구를 지켜온 협회 고위 관계자들이 미리 귀띔을 해줬어야 한다. 현장인 출신 행정인이 고위층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그 경험을 젊은 선수단에 풀어주라고 있는 것이다. 말실수를 한 김영권도 분명 반성해야 할 부분이 있지만, 이처럼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을 미리 귀띔해주지 않은 관계자들의 업무 태만이 더 큰 잘못이다. 현재 행보를 보면 이들은 또 감독과 선수단 뒤로 숨었다. 선수만 사지로 내몰고 있다. 누구도 이번 논란에 대해 책임자로서의 책임감 있는 행동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29일에 숨겨졌던 두 가지 사실.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한국 축구는 그것을 놓쳤고, 위기에 몰렸다. 여러 가지로 아쉬움이 남은 이란전이다.

young0708@sportsworldi.com 

사진 = 권영준 기자, O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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