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광을 되찾기 위해!”
농구가 어떤 운동인지도 모르던 국민학생 소년. 교실 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너 나와”라는 선생님의 부름에 영문도 모른채 불려나간다. 이내 농구장으로 데려가더니 선생님께서 공을 던져준다. 그렇게 시작된 농구 선수의 길. 그 소년은 프로 선수, 지도자, 그리고 단장자리까지 오르는 한국 농구계 산 증인이 된다. 임근배 삼성 농구단장의 이야기다.
선수 시절 정확한 외곽포와 근성있는 수비로 이름을 알렸던 임 단장은 1989년 현대전자에서 프로로 데뷔해 1998년까지 코트에서 구슬땀을 흘렸다. 은퇴 후 신세기·현대모비스 코치로 활동하며 지도자 경력을 쌓았고, 2015년부터 2024년까지는 삼성생명 감독으로 팀을 이끌었다. 2020년대 들어 여자농구판에 불어온 젊은 지도자, 여성 지도자 열풍 속에서도 베테랑의 품격을 선보이며 성과를 냈다. 삼성생명의 챔피언결정전 진출 3회를 이끌었고, 2020∼2021시즌엔 우승 트로피까지 들었다. 이후 2023~2024시즌 종료와 함께 지휘봉을 내려놓고 코트를 떠났다. 그랬던 그가 1년 만에 돌아왔다. 지난 4월 삼성스포츠 농구단장에 선임됐다. 남자프로농구(KBL) 삼성 썬더스와 여자프로농구(WKBL) 삼성생명 블루밍스 통합 단장이다.

◆선수 시절부터 쌓아온 신념
친숙한 옆집 아저씨처럼 수더분하고 인자하다. 선수 시절도 그랬다. 외유내강이라는 단어가 어울렸다. 화려하지 않았지만, 코트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플레이로 인정받았다. 농구대잔치 시절을 경험하고, 1997년 출범한 KBL 원년 멤버로 프로농구 코트도 밟았다. 이후 유재학 현 KBL 경기본부장을 보필하며 코치로 지도자 수업을 받았다. 그렇게 삼성생명 감독 자리를 제안받았다. 여자 농구를 경험하지 못했기에 망설이기도 했지만, 결정을 내린 이후에는 빠르게 변화했다. 팀 체질개선에 나서면서 세대교체에 성공했고, 우승이라는 성과도 챙겼다. 특히 삼성생명은 선수라면 누구나 가고 싶은 구단으로 변모했다.
힘차게 달려온 발걸음, 그 과정에서 임 단장이 선수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인성’이었다. 그는 “나는 농구가 최고의 스포츠라고 생각할 정도로 아직도 농구가 가장 좋다. 승부욕이 불타오르는 것도 농구뿐이다. 더 뛰고 싶었던 욕심이 났었던 이유”라면서 “선수 시절을 거치며 생긴 신념 중 하나가 잘한다고 해서 대우받는 걸 당연하게 여겨선 안 된다는 것이다. 책임과 의무도 당연히 해야 한다. 삼성생명에 와서 가장 먼저 ‘선배의 갑질 문화’를 없앴다. 인성은 가장 가까운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시작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요즘 농구계에선 농담으로 대회가 열리는 곳엔 임 단장이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지난 5월부터 본격적으로 단장 업무를 시작한 그는 쉬지 않고 경기를 본다. 잠시 놓고 있었던 남자 농구의 시간을 빠르게 학습하고, 새로운 여자 선수들을 눈여겨보기 위함이다. 임 단장은 “바쁘다. 남녀를 다 하고 있으니 바쁠 수밖에 없다”고 웃은 뒤 “대회가 있으면 최대한 직접 가서 보려고 노력 중이다. 조금은 낯선 행정 업무도 봐야 하니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농구장 안팎을 다 들여다보는 것, 임 단장이 선택된 이유다. 그는 “뛰어난 행정 능력을 기대하고 나를 뽑으셨을 리 없지 않나. 남자팀 삼성이 최근 몇 년간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었고, 여자팀 삼성생명도 더 높은 곳을 바라봐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사이에서 보탬이 되라고 내가 있는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감독님들이 추구하는 농구에 간섭하지 않는 범위에서 도움이 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더 많이, 더 잘 알아야 한다. 경기를 많이 볼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삼성과의 긴 인연이 단장직으로 바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답게 까다로운 절차를 거쳤다. 임 단장은 “지난 1월 제의를 받은 뒤 두 달간 소식이 없었다. 그 시간이 곧 평판 조회 기간이었다. 나뿐 아니라 후보자 모두가 같은 과정을 거쳤다”며 “삼성에 오래 있었다는 이유로 쉽게 단장이 됐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건 삼성 시스템을 모르는 얘기다. 3월에 면접을 보고 4월이 돼서야 선임 통보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아직 ‘단장’이란 직함이 낯설다. 초반엔 뒤에서 “단장님!”하고 불러도 자신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뒤를 돌아보지 않기도 했다. 임 단장은 “처음엔 조금 어색하기도, 불릴 때 낯설게도 느껴졌다. 감독이라는 소리를 쭉 듣다가 단장이라고 하니까 귀에 익지도 않았다. 아직 나를 부르는 사람 중에 가끔 감독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지금은 익숙해졌다”고 허허 웃었다.

◆삼성 농구단의 미래
감독을 맡을 때보다 더 큰 책임감과 중압감이 어깨를 누른다. 하지만 이젠 코트에서 직접 할 수 있는 건 없다. 코트 밖에서 소통하고 뛰어야 한다. 더 어려운 과제를 맡았다. 임 단장은 ‘장기나 바둑을 둘 때 시끄럽게 훈수만 두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고 외친다. 감독을 해본 만큼 고유 권한에 대한 존중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다.
삼성과 삼성생명의 방향성에 대해 묻자, 임 단장은 연신 조심스러워하며 말을 꺼냈다. 그는 “간섭이 돼선 안 된다. 코칭스태프들의 의견을 존중하며 같이 가야 한다. 그들을 힘들게 해선 안 된다. 지나친 간섭은 금물이며 필요할 때, 중요할 때 도와줄 수 있어야 한다”며 “단장으로서 농구에 대해 잘 알아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고, 보이는 게 많을 수밖에 없다. 이때마다 스스로를 경계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이제는 팀만 잘 이끌어서 되는 일이 아니다. 남녀농구단 전체를 아우르며 본사와의 가교 역할도 해야 한다. 임 단장은 “책임감이 더 커졌다. 감독할 때는 내 팀만 딱 신경 쓰면 됐지만, 이제는 남녀팀 모두를 하고 있으니 양쪽 모두에 책임을 져야 한다”며 “윗선과 현장의 중간에서 소통해야 한다. 성적에 따라 윗선과 직접 대면해야 할 일도 있을 거다. 그런 면에선 아직 해보지 않아 부담감도 든다”고 솔직하게 토로했다.
모든 삼성인들이 비시즌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특히 삼성은 4시즌 연속 최하위를 기록하며 자존심을 구겼다. 변화가 필요하다. 외국인 선수를 대거 교체했다. 지난 2시즌 동안 골밑을 지켰던 코피 코번과 계약을 종료하고, KBL 정상급 득점원 앤드류 니콜슨과 베테랑 포워드 케렘 칸터를 영입했다. 자유계약선수(FA) 시장에서도 이근휘, 이관희, 한호빈 등을 영입하며 전력을 살 찌웠다. 삼성생명도 ‘집토끼’ 강유림을 지키면서 전력 누수를 최소화했다.
임 단장은 “비시즌이 가장 바쁘다. 연습경기를 보면서 준비대로 잘 진행되고 있는지, 시즌을 앞두고 계획한 방향성대로 잘 흘러가고 있는지 점검할 것”이라며 “삼성이라는 이름값을 해야 한다. 남자팀은 부진했던 게 사실이다. 팬들을 위해서라도 새 시즌은 정말 달라진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게 1차 목표다. 삼성생명은 비교적 잘하고 있지만, 다시 챔피언결정전에 오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어른의 영향력
임 단장은 아직도 농구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이유를 모른다. 무작정 불러세워 농구공을 쥐게 해줬던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미래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임 단장은 “선생님께서 나를 지목했던 순간이 아직도 또렷하다. ‘왜 나였을까’싶다. 키가 반에서 중간 정도, 체격은 뼈만 있을 정도였는데…”라며 “선생님께 여쭤보고 싶었는데, 일찍 돌아가셔서 답을 듣지 못했다. 영문도 모르고 시작했지만 운이 좋게 여기까지 왔다. 감사한 마음”이라고 전했다.
눈빛에서 느껴지는 에너지, 사람의 직감이 순간 통하지 않았을까. 추측만 해볼 뿐이다. 임 단장은 그때 선생님의 그 마음을 되새기며 원석을 발굴하고, 농구 명가의 부흥을 이끄는 어른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자 한다.
임 단장은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입을 열었다. 한국 체육 미래에 대한 깊은 걱정이다. 그는 “다다음 올림픽 정도면 선수가 없어서 출전하지 못할 종목도 생길 수 있다. 한국에선 야구와 축구를 제외하곤 선수 엔트리가 부족하다는 말이 계속 나오고 있다. 개인 종목은 더 어렵다”고 걱정했다.
이어 “일본은 ‘1인 1기(학생 1인당 1개 이상의 스포츠·예술 활동 참여)’가 자리잡았다. 꼭 선수가 아니라도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즐기는 학생들이 많다. 다양한 종목의 실력이 상승하고 경쟁력이 생긴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학생 스포츠 의무화는 단순히 한국 스포츠 경쟁력만을 위한 게 아니다. 임 단장은 “운동을 해야 하는 이유, 운동의 긍정적인 부분에 대한 논문은 수도 없이 많다”며 “체육 산업 발전을 넘어 국력과 직결되는 국민 건강 증대, 청소년 범죄 감소 등으로 사회·경제적 비용 절감, 건강보험 등 복지 재정 부담 완화의 효과 등이 있다. 학생들이 의무적으로 운동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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