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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 풍경소리]부모에게 받은 몸 훼손 않는 것도 효의 하나

입력 : 2009-08-14 09:16:13 수정 : 2009-08-14 09: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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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 역학연구원장
문명의 이기가 인간의 생활을 편하게 하지만 칼과 같은 양면성이 있어서 잘못 사용하면 없는 것만 못하니 그 칼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마음과 자세를 잡아주는 것이 효교육이다. 효교육이 부실하여 목숨을 하찮게 생각하고 남을 해하거나 자신을 저버리는 예가 요즘 너무나 빈번하다.

어려움을 극복하며 빈곤한 생활 속에서 이겨나가는 것이 길들여지지 못한 우리 젊은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자살 충동 동반자를 구하고 쉽게 떠나가는 방법을 택하여 세상을 하직하는 예가 탤런트를 비롯하여 삼사십대 가장과 모자, 오육십대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효교육의 경전과 같은 ‘효경’의 첫번째는 내 몸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함부로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효의 시작이라 했다. 이에 따라 명과 조선인들은 머리털을 자르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머리털을 함부로 자르는 일이 없었으며, 빠진 머리털을 아침마다 모아 1년의 마지막 날에 태우는 것을 보통 생활의 규범으로 했다.

태어난 지 100일이 되는 아이는 이마의 앞부분 머리를 잘랐는데, 이는 눈을 찌르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고 이것을 베넷머리라고 했다. 이후 남자 아이의 경우에는 머리를 두 조각으로 갈라 양쪽으로 댕기를 늘인 후 다시 하나로 합쳐 내렸고, 이를 각이라고 부르고 여자아이는 머리를 네 조각으로 갈라 각각 묶은 후 하나의 댕기로 만드는데, 이를 기라 하였다. 100일에 자른 베넷머리는 장가갈 때나 시집갈 때 전해주었다.

우리나라 사람이나 중국인이나 자란 후 머리를 자르는 일을 대단한 치욕으로 여겼다. 우리나라의 경우 1895년 을미사변 후 일본이 우리나라의 전통 사상을 말살하기 위한 정책으로 단발령을 선포하자 많은 선비들이 ‘머리는 잘라도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라는 사상으로 부모로부터 받은 신체를 함부로 훼손할 수 없다 하여 머리 깍기를 거부하고 옥에 갇히는 사태가 빈번히 발생했다. 자기 신체를 보존하는 것은 부모에 대한 효도의 첫번째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대마도로 끌려가 스스로 단식하다 순국한 면암 최익현 선생이 그 대표자다.

중국의 경우도 청 왕조가 들어서면서 변발을 강요하자, 이에 반발한 사람들이 많았다. 머리털을 자르는 것은 오랑캐나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변발은 무협 영화에 자주 나오는데 그 정수리 앞까지를 삭발하고 뒤로 넘겨 댕기를 땋은 것을 말한다.

조선에서는 손발톱을 일정한 주기로 잘랐다. 보통은 음력 보름께에 잘랐다. 왜냐하면 이때는 모든 귀신들이 빛을 두려워하여 잘 움직이지 않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때 자른 손발톱은 따로 모아 두었다가 연말에 불태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 유풍이 지금도 남아 돌아가신 분의 손발톱을 각각 다른 4개의 주머니에 넣어 관에 담는 것이다.

손톱을 밤에 함부로 잘라 버리면 쥐가 먹고 변신한다는 설화가 있다. 이 설화는 손톱이나 머리털은 부모께서 주신 것이니, 감히 함부로 하지 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쥐가 등장하는 것은 우리 속담에서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라는 말이 있듯이, 옛 사람들은 쥐를 영리하면서도 신비력을 가진 동물로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손톤조차도 귀하게 다루던 우리 조상들의 지혜로움을 현대인들이 지킴으로써 사회적인 자살 소동은 없어질 것이다.

김상회 역학연구원장

www.saju4000.com, 02)533-8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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