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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7-03-20 04:40:00, 수정 2017-03-20 04:40:00

[차길진과 세상만사] 89. 따스한 바람이 부는 길을 걷다.

  • 전국에는 어림잡아 3000개의 둘레길이 있다. 환경부와 산림청 외에도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각 지방자치단체들이 예산을 투입하여 새로운 둘레길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둘레길이 늘어남에 따라 탐방객들이 늘고 걷는 인구도 매년 많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따뜻한 봄이 되었으니 많은 사람들이 둘레길을 찾을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오래도록 흔적이 남을만한 길을 생각하면 아마도 고산자 김정호와 조선통신사가 걸었던 길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김정호의 경우 남겨진 자료가 별로 없어 어떤 길로 다녔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지도를 만들기 위해 전국을 구석구석 안 가본 곳이 없을 거라는 것은 짐작할 수가 있다.

    오래 전 우연한 기회에 일본 전국 걷기대회에 참가했던 사람이 있다. 그는 1998년 10월 우연히 펼친 아사히(朝日)신문에서 2년 간 일본 전국을 도보로 답파할 대원을 모집한다는 작은 사고(社告)를 보았다고. 47개 도도부현(都道府縣)의 주요지점을 모두 연결해서 1만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걷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면서 덜컥 나섰다며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고 말한다. 그 대회 참가자 중 그는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일본을 걷는다는 것은 저에게 마치 고고학적 발굴 현장을 어깨너머로 힐끗 거리는 것 같았습니다. 어디를 가나 한일 두 나라, 두 민족이 아주 먼 예전부터 바로 오늘까지 부대껴온 삶의 흔적들이 삐죽 얼굴을 내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소한 흔적이라도 그것은 우리 두 나라가 살아온 내력을 증명해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절대 소홀히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근거 위에서만이 진정한 이해가 가능할 것입니다.”

    그가 참가했던 행사의 정식 명칭은 ‘헤이세이의 이노우 타다타카, 21세기 일본을 걷자!’라는 것이었다. 이노우 타다타카(伊能忠敬)는 1800년대 일본의 김정호 같은 사람으로, 치바(千葉)현의 성공한 미곡상으로 50세에 은퇴 후 동경으로 진출하여 천문관측, 측량 기법을 익히고, 55세부터 17년 간, 일본 전국을 걸어 실측한 자료를 바탕으로 당시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일본지도를 그려낸 인물이었다. 한 마디로 지도를 만든 사람이 걸었던 그 길을 따라 걷자는 행사였다.

    그의 말을 들었을 때 우리도 지도를 만들기 위해 전국을 걸었던 고산자 김정호의 길을 따라 걷기 행사를 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김정호 길을 답파(踏破)하자는 행사는 없는 것으로 아는데 전국에 있는 둘레길만 잘 연결해도 충분히 ‘김정호 길’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또 하나 조선통신사 파견은 1607년부터 1811년까지 200여 년 동안 열두 차례 진행되었다. 조선통신사 일행은 한양에서 부산을 거쳐 다시 일본 동경까지 최소 6개월 이상이 소요되는 결코 짧지 않은 길을 걸었다. 전쟁으로 인한 갈등을 풀고 긴 여로의 곳곳에서 일본의 많은 문인들과 필담을 나누는 등 두 나라의 선린외교와 문화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 정신과 문화적 유산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그동안 꾸준히 조선통신사 옛길을 답사하고 걷는 행사가 진행되어 왔다. 2007년에 시작하여 올해로 여섯 번 째를 맞이하는 ‘21세기 조선통신사 옛길 한일우정걷기’는 오는 4월 1일 서울 경복궁을 출발하여 부산까지, 다시 부산에서 일본 동경까지 총 1158㎞를 52일간 걷는다고 한다. 이에 맞춰 일본에서도 요코하마 야마시타 공원을 출발해 이세자키쵸 6가까지 걷는 ‘조선통신사 행렬’ 가장행렬을 가진다고한다.

    조선통신사와 김정호는 어려운 여정을 떠났다. 그러나 결과는 좋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길을 나섰다. 조선통신사는 두 나라가 신의를 나누고 상생(相生)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그 먼 거리를 걸었을 것이고, 김정호는 제대로 된 지도를 만들고자 전국을 걸었을 것이다. 이제 또 다른 한일우정걷기가 시작된다. 400년 전에 그랬듯이 한일 양 국민이 통신사가 걸었던 길을 걸으면서 경색된 마음을 푸는 따듯한 행사가 되었으면 한다.


    ◇차길진

    [약력] (사)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사)후암미래연구소 대표, 차일혁 기념사업회 대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운영자문위원, 현 경찰박물관 운영위원, 화관문화훈장 수훈, 넥센 히어로즈 구단주 대행

    [저서] 어느날 당신에게 영혼이 보이기 시작한다면, 또 하나의 전쟁, 효자동1번지, 영혼산책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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