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은 끝이 정해져 있는 책이 아니라, 내가 채워나가야 하는 빈 노트라는 걸···.”
최근 종영한 tvN 드라마 ‘미지의 서울’ 대사 중 하나다. 인생의 결말을 내는 건 자기 자신이며, 노트를 채우기 위해 나아가고 도전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여자축구 센터백 정은욱의 책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의 책을 완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한다. 뉴질랜드에서의 첫 번째 도전을 마치고 이번엔 몽골리그 코브드 웨스턴 FC(Khovd Western FC)로 향한다.
뉴질랜드 리그 엘러슬리 AFC(ElLERSLIE afc)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지난 10일 코브드에 합류했다. 정은욱은 “몽골리그가 유명한 리그는 아니지만 외국인 선수를 영입한다는 것 자체가 팀이 축구에 관심이 많고 서포트할 의지가 있다는 것”이라며 “외인으로 가는 만큼 좀 더 좋은 퀄리티의 축구를 보여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덕대를 졸업한 정은욱은 2021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수원도시공사(현 수원FC위민)의 유니폼을 입었다. 냉정한 프로의 세계에서 자리 잡기는 쉽지 않았다. 유니폼을 벗어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다. 후회하기 싫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돌렸다. 다시 대학으로 돌아간 배경이다. 대경대선 달라진 마음으로 그라운드를 뛰었다. 보다 절실했고 간절했다. 성과는 드러났지만, 한번 떠난 프로에서 다시 러브콜을 받기란 쉽지 않았다.
해외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올해 2월 엘러슬리로 향했고 총 15경기를 소화했다. 정은욱은 “처음엔 설렘 가득했다. ‘망하라는 법은 없구나’ 싶었다”면서도 “생활적인 측면은 문제가 없었는데, 한국과 다른 훈련 환경에 적응하느라 애를 먹었다. 한국은 타이트한 훈련 스케줄을 따라가다 보면 몸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뉴질랜드에서 공식 훈련은 일주일에 두 번 정도였다. 스스로 해야 한다는 점이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변곡점이 됐다. 축구를 더 사랑하고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지가 불타올랐다. 정은욱은 “뉴질랜드 선수들은 도전을 안 무서워하더라. 완전히 공격적인 축구를 했다. 수비적으로 하는 내가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었다”며 “알게 모르게 있던 축구에 대한 압박감을 내려놓게 됐다. 축구를 좋아하고, 잘하고 싶은 마음은 꾸준했으나 이전까진 즐기지 못했던 것 같다.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에 축구 본질 자체를 생각하지 못했다”고 돌아봤다.
이어 “4년 전에도 프로 선수였지만, 그때는 말만 프로였다”며 “이제야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하고 진정한 프로 선수가 된 것 같다”고 덧붙였다.

달라진 마음가짐, 밤낮으로 배워 익힌 영어가 수확이다. 이제 이 무기를 들고 몽골 그라운드를 누빈다. 정은욱이 향하는 코브드는 몽골리그서 지난 시즌 1위를 차지해 새 시즌 아시아축구연맹(AFC) 여자 챔피언스리그(WACL)에 나선다. 지난 시즌 출범한 WACL은 AFC가 주최하는 여자 클럽 최상위 대항전이다. WK리그 인천 현대제철도 참가했으며 준결승까지 진출한 바 있다.
참가 클럽이 확대됨에 따라 코브드도 처음으로 예선 출전권을 얻었다. 다음 달 23일부터 31일까지 19개 클럽이 5조로 나뉘어 예선을 치른다. 코브드는 A조에 속해 다음 달 25일 첫 경기를 소화한다. 각 조에서 1위를 차지한 5팀만 본선행 티켓을 얻는다. 본선은 자동 진출한 7개 팀과 예선을 통과한 5개 팀, 총 12개 팀이 참가한다. WK리그 수원FC 위민은 이미 자동 진출을 확정했다.

WACL 첫 출전인 만큼 코브드의 의지가 남다르다. 성과를 내기 위해 정은욱까지 영입했다. 정은욱 역시 큰 무대서 뛸 기회를 잡고자 코브드를 선택했다. 그는 “뉴질랜드에서의 생활이 좋았지만, 안주하면 안 될 것 같았다”며 “몽골 무대를 발판으로 갈 수 있는 곳까지 가보고 싶다. 나라고 꼭 안되리란 법도 없지 않나. 유럽 진출은 막연한 꿈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도움 주시는 분들도 있고 몽골에서 잘하면 스텝바이스텝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 여자축구를 사랑하는 마음도 도전의 이유다. 정은욱은 “편하게 살아온, 일반적인 축구선수의 삶은 아니지 않나. 당장 잘 풀리지 않더라도 자신의 할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도움의 손길도 오고 어떻게든 길이 열리는 것 같다”며 “한국엔 축구를 잘하는 선수들이 많은데, 포기하는 선수들이 많아서 너무 아쉽다. 같이 나아갔으면 한다”고 희망을 띄워 보냈다.

마지막으로 “첫 번째 도전을 함께해준 우리 가족과 엘러슬리, 킹스 패밀리들에게 정말 고맙다. 이 길을 열어준 에이전시에게도 정말 감사하다”고 전하며 두 번째 도전을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 세계비즈앤스포츠월드 & sportsworldi.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