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물의 한강, 설국의 레일, 기생충의 계단을 지나, 봉준호 감독이 마침내 우주에 발을 디뎠다. 전작으로 아카데미 4관왕에 오른 그는 부담과 기대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놀랍도록 기이하고 인간적인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영화 미키 17은 사망해도 이전 기억과 모습을 간직한 채 되살아나는 미키(로버트 패틴슨)의 열일곱 번째 삶을 다룬 이야기다. 죽으면 다시 복사되는 소모품 인간 미키가 삶의 경계에서 마주한 충격적인 사건을 담았다.
제작사 워너브라더스는 미국 작가 에드워드 애슈턴의 SF소설 미키 7의 초고를 보고 판권을 사들였다. 그리고 옥자(2017)를 만든 제작사 플랜B에 14쪽짜리 요약본을 보냈고, 플랜B는 이를 다시 봉준호 감독에게 보냈다. 봉 감독은 “관객이 2시간 동안 정신없이 재밌게 보는 것이 목표”라는 마음을 담아 영화로 만들었단다.

그래픽과 CG, 예산은 할리우드급이지만 연출은 여전히 봉준호스럽다. “1억1800만 달러, 그러니까 1700억짜리 영화지만, 200만(약 29억 4000만원) 달러를 남겼다”며 특유의 실속형 자부심도 잊지 않았다.

국내 동원 관객은 300만, 아픈 손가락이지만 최선을 다했기에 아쉬움은 없다. 모든 작업은 기존 방식 그대로다. 시나리오 집필부터 편집, 크리처 디자인까지 손에 잡히는 곳마다 그의 손길이 닿았다. 특히 크리퍼라는 생물체의 디자인은 “원작에서는 지네처럼 삐죽삐죽한데, 저는 동글동글한 모양을 생각했다. 아르마딜로라는 동물이 있다. 동그랗게 몸을 말아서 굴러간다”며 “또 크루아상도 생각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내일 크루아상을 보면 움직일 것처럼 생겼을 것”이라고 말하며 웃는다.
로버트 패틴슨이 주인공 미키를 연기했다. 봉 감독은 “각본을 쓴 게 2021년이다. 그때 처음 만났다. 처음부터 미키처럼 들어오더라. 실없이 웃으며 들어오는데 영락없는 미키의 모습이었다”고 전했다.
마크 러팔로는 독재자 마샬 캐릭터를 맡았다. 마샬을 두고 미국 대통령인 도날드 트럼프를 모델로 한 것이 아니냐는 말로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해 봉 감독은 “유럽과 미국 사람들이 떠올리는 정치인이 각각 다르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한 영국 기자는 나에게 ‘봉 감독 집 뒷방에 미래를 볼 수 있는 크리스털 볼이 있냐’고 물었다. 이탈리아의 한 기자는 ‘독재자 무솔리니가 생각난다’고도 했다”며 “사실 과거 정치인들을 모델로 만들었다. 2021년에 시나리오를 썼다는 걸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여러 해석이 나오는 이유는 마크 러팔로가 워낙 연기를 잘해준 덕분이라고 생각한다”고 감사함을 표현했다.

외형은 분명 SF다. 복제, 우주, 크리처가 주요 소재다. 그러나 그 안에는 여전히 사람이 있다. “‘인간 프린팅’이라는 게 SF처럼 느껴지지만 현실에도 있다”고 꼬집었다. “사고로 누군가 퇴장하면 곧바로 그 자리에 다른 노동자가 채워진다. 이런 시스템이 쭉 이어진다. 그런 현실에서 출발했다. 영화에서는 미키가 반복하는 거다. 현실적이고 잔혹한 콘셉트”라고 설명했다.
봉 감독은 영화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묻는 질문을 남겼다. 반복되는 죽음과 프린팅이라는 SF적 상상력 속에서도 ‘나는 누구인가’, ‘나의 존재는 어디까지 복제될 수 있는가’라는 정체성의 딜레마를 유머와 비극을 교차시키며 풀어냈고, 결국 어떤 상황에서도 파괴되지 않는 인간의 생존 본능과 연대의 가치를 관객의 마음속에 새겼다.
최정아 기자 cccjjjaaa@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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