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개 항아리 자연 발효 방식 통해
전통 간장·된장·고추장 숙성 시켜
신창호 등 유명 셰프들 피드백 반영
일정한 맛으로 품질력 유지에 힘써
장 활용법에 야채 찍먹밖에 생각 안 나
셰프들과 협업 등 다양한 방법 시도
모두가 사랑하는 스리라차소스처럼
전통 식품 맛 또한 널리 알리고 싶어
맛있는 한식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는 단연 ‘장’이다. 선조들은 ‘음식 맛은 장맛’이라고 했다.
한국에는 수많은 명인들이 전통 장맛을 지켜오고 있다. 최근에는 장 담그기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며 가치를 다시금 인정받았다. 여기에 한국 요리가 글로벌 트렌드로 부상하고 있다. 세계적인 셰프들도 한국을 찾으면 으레 명인의 장맛을 보러 지방으로 향한다. 특히 미슐랭 셰프들이 찾는 곳 중 하나가 경북 영주의 ‘만포농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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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유일의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 ‘모수’의 안성재 셰프를 비롯해 ‘주옥’의 신창호, ‘밍글스’의 강민구 등 국내 정상급 셰프들이 이곳의 장을 사용한다. 세계적인 미슐랭 3스타 프랑스의 엠마누엘 르노, 싱가포르 오데뜨의 줄리앙 로이어, 벨기에의 팀 보우리 셰프 등도 찾았다.
소백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영주는 장이 익기 좋은 환경을 갖췄다. 만포농산은 자연발효 방식으로 1000여 개의 항아리에서 전통 간장, 된장, 고추장을 숙성한다. 건강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무량수(無量壽·영원한 생명)’라는 브랜드 이름을 붙였다.
정병우 대표는 2대째 전통장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처음부터 장을 담근 것은 아니다. 그는 제일기획에서 전략컨설팅을 담당했고, 제일펑타이의 광저우 법인장을 지냈다. 이를 뒤로하고 과감히 사업을 물려받았다. 아버지가 외할머니의 손맛을 알렸다면, 정 대표는 가치를 지켜나가며 무량수 장맛을 알리는 중이다. 10일 정 대표를 만나 그의 음식 철학과 경영전략을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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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째 장을 만들고 발효를 연구하고 있다. 처음부터 이어받으실 생각이었나.
“막연히 생각은 했었다. 제가 외아들이라서 ‘언젠가 가업을 물려받아야 하지 않을까’란 마음은 늘 있었다. 장을 담그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을 했지만 사실 온라인 아이디를 만들 때 반은 진심, 반은 장난으로 ‘된장재벌 2세’라는 이름을 썼을 정도였다.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준비 없이 가업을 물려받게 됐다. 가슴 아픈 이야기인데 부모님 모두 사업을 이어받지 말라고 하셨다. 힘들어서가 아니라, 시장 규모가 점차 줄어든다는 이유 때문에서였다. 하지만 30년 넘게 이어온 것을 포기하는 게 어렵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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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모르는 분야였는데 운영을 결심한 것도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 같다.
“처음에는 생산 공정에는 손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영업에만 집중하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장맛에 문제가 조금 있었다.
우환이 생기면 장맛이 변한다고 하지 않나. 아버지는 지병으로 거동이 어려우셨고, 어머니는 병수발로 바쁘셨다. 음식 만드는 집에서 맛이 없으면 끝 아닌가. 레시피가 있어도 이를 감각 없이 기계적으로만 따르면 절대 ‘그 맛’이 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결국 장을 배우게 됐다. 당시 퇴직금을 털어 배우고 설비 사는 데 썼다. 적자도 엄청났다. 지금에서야 조금씩 이익이 나고 있다(웃음).”
-맛을 잡아가는 과정은 힘들지 않았나.
“명인들은 대대로 전해 내려온 가문의 레시피를 기반으로 장을 담근다. 하지만 내게는 그런 게 없었다. 균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미생물 균주를 어떻게 키울 것인지 깊이 파고들었다.
명인들도 수없이 찾아다녔다. 배울 점도 많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염도계를 왜 쓰지 않느냐고 물으면 계란을 띄워 염도를 가늠하면 된다고 했다. ‘조상님이 훌륭한 지혜를 주셨는데, 굳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과학적인 내용을 묻자, 젊은 세대가 전통을 무시한다는 얘기로 흘러가곤 했다. 고민이 깊어졌다.
우선은 논문을 찾아 이론적인 공부부터 했다. 만드는 방식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생기자 된장, 고추장, 간장을 만드는 방식보다 중요한 것은 결국 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입맛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내가 만든 된장을 내가 먹고 맛있다고 하면 안 되겠다, 쓰는 사람에게 물어봐야겠다’ 싶어 셰프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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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프들이 어떻게 해답을 알려줬나.
“직장 다니던 시절 한식 파인 다이닝을 찾을 기회들이 있었다. 정식당, 밍글스, 권숙수, 온지음 등에서 많은 것을 느꼈지만 가장 큰 영향은 ‘주옥’이었다.
이곳의 시그니처 메뉴 ‘들기름’을 먹었다. 해산물, 메추리알 올리고 간장소스와 들기름을 붓는 메뉴다. 너무 놀랐다. ‘이런 맛이 날 수 있구나’ 싶었다. 한식의 미래 가능성을 봤다. 무량수를 이어갈 것을 결심하게 된 계기 중 하나다.
회사를 물려받고 주옥의 신창호 셰프를 무작정 찾아갔다. 고민하던 내용을 말씀드리고 같이 작업하자고 이야기했다. 흔쾌히 오케이 해주셨다.
셰프님과 1000개의 독의 장을 하나하나 모두 맛봤다. 신 셰프가 ‘괜찮다’고 한 독의 장만 팔았다. 내가 처음 만든 된장을 신 셰프가 맛있다고 했던 날이 가장 기쁜 날이었다.
장은 만드는 해마다, 심지어 같은 해에 만든 장도 독마다 맛이 조금씩 다르다. 그렇다고 맛이 다른 제품을 소비자분들에게 판매할 수 없었다. 일정한 맛을 유지하기 위해 번거롭지만 블렌딩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샴페인, 위스키도 ‘리저브’를 만들지 않나. 여러 독의 된장을 섞어 우리만의 맛을 ‘일정하게’ 지켰다. 번거롭지만 만드는 이가 번거로워야 드시는 분들께 더 좋은 제품을 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
-무량수의 장, 국내 미슐랭 레스토랑에서도 많이 쓴다고 들었다. 어떤 셰프가 주로 쓰나.
“모수의 안성재 셰프는 된장, 고추장, 참기름, 들기름 등을 쓴다. 신창호 셰프도 된장, 간장을,강민구 셰프도 비건 메뉴에 된장을 쓴다. 그 외에 휴135, 세스타, 물랑 등 여러 레스토랑에서 사용해주고 계신다. 감사할 뿐이다.”
-꾸준히 셰프님들과 협업하는 이유가 있나.
“장은 ‘엔드 프로덕트’가 아니라 소비자가 잘 써주셔야 하는 제품이다. 셰프들을 찾을 때마다 ‘내가 만든 장이 이렇게 변할 수 있구나’ 감탄한다. 예를 들어 안성재 셰프는 우리 장을 본인의 누룩으로 한번 더 발효하기도 한다. 사용하시는 분들의 의견이 반영돼야 좋은 장이지 않을까 싶다.
특히 맛이라는 것이 주관적이지 않나. 셰프들로부터 좀더 객관적인 기준에서 맛에 평가를 내리는 훈련을 할 수 있었다. 톱 셰프들은 어떻게 만들어달라는 말보다 잘못된 부분만 지적해주시는 경우가 많다. 나머지는 내 취향이라고 존중해주신다.”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
“프랑스 유명 양조장 자크 셀로스의 오너 앙셀므 셀로스가 무량수를 찾았다. 된장을 한입 먹고는 어떤 균을 쓰는지 맞추더라. 이래서 거장이구나, 싶었다.
당시 셀로스가 ‘결국 당신은 나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이라며 자신은 산파라고 한 말이 인상깊다. 포도를 내버려두면 와인이 되는데, 자신은 포도가 더 맛있는 와인이 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는 거다.
매우 동감한다. 콩을 찌고, 균이 좋아하는 환경에 놔주고, 때가 되면 열어주고 닫아주는 것. 나 역시 산파고 보모가 아니겠나.”
-국내 최고의 셰프들이 무량수의 장을 쓴다. 이유가 있다면.
“맛은 주관적인 요소다. 하지만 우리 제품의 강점은 ‘맛의 일정함과 퀄리티’다. 돈 받고 만드는 제품은 품질이 일정해야 한다. 이를 위한 노력을 좋게 봐주시는 게 아닐까 싶다.”
-K-푸드가 떠오르고 있다. ‘무량수의 세계화’도 꿈꾸나.
“물론이다. 중요한 것은 전통을 현대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제가 장을 만든다고 해서 굳이 한복을 입고 만들 필요는 없지 않나. 백종원 씨가 라면을 끓일 때 ‘쌈장을 넣으면 맛있어요’라고 말하는 게 오히려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이런 작업을 꾸준히 해나가려 한다. 직접 하기 어려우니 셰프들에게 맡기는 것이다. 다양한 협업을 시도하는 중이다. 전통 장을 더 많은 사람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새로운 방식을 계속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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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는 컬래버레이션이 있다면.
“한국 장과 캘리포니아 치즈 컬래버레이션 프로젝트다. 치즈와 장의 컬래버레이션 메뉴로 무량수에서 갈라디너를 진행했다. 섞지 않을 이유가 없겠더라. 유제품도, 한국의 장도 발효 식품이니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았다. 일본에서도 크림치즈와 미소를 섞는 식으로 시도를 많이 하더라. 당시 바바라 알렉산더 셰프와 세스타 김세경 셰프가 각각의 스타일로 컬래버레이션 메뉴를 만들었는데 잘 어울려서 놀랐다. 기억에 남는 것은 사워크림 대신 고추장 크림치즈를 쓴 새우 토스타다. 4가지 유제품과 장을 더한 소스도 내놨다.”
-무량수의 목표와 비전은.
“한국을 대표하는 소스를 만드는 게 꿈이다. 외국인 친구들로부터 된장, 고추장을 어떻게 쓰냐고 하는 말을 듣는 게 스트레스다(웃음). 장을 담그는 사람인데도 고추장·된장을 소스처럼 먹을 수 있는 방법이 뭐냐고 물었을 때, ‘야채스틱에 찍어 먹는 것’ 정도밖에 생각이 나지 않더라. 스리라차·타바스코 등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소스처럼 고추장, 된장도 맛있고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으려 한다. 전통의 핵심 가치는 지키되 끊임없는 혁신으로 한국 전통식품이 가진 맛의 즐거움을 보여드리고 싶다.”
정희원 기자 happy1@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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