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의 세월을 무대와 카메라 앞에서 살아온 배우들이 멈추지 않는 연기 열정을 보여주고 있다. 관록과 내공으로 무장한 원로배우들은 단순한 현역을 넘어 후배들에겐 길잡이가 되고, 관객에게는 시간의 무게를 전한다.
연기 경력 60년을 훌쩍 넘긴 국민배우 김혜자(83)는 로맨스 드라마의 여주인공으로 시청자를 만나고 있다. 최근 방송을 시작한 JTBC ‘천국보다 아름다운’을 통해서다. 이 드라마는 80세 모습으로 천국에 도착한 이해숙(김혜자)이 30대 모습으로 젊어진 남편 고낙준(손석구)과 재회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김혜자는 여주인공 이해숙으로 분해 본인보다 41세 어린 배우 손석구와 호흡을 맞추고 있다. 천국을 배경으로 현생을 초월한 사후 로맨스를 펼치며 화제몰이 중이다.
김혜자는 일반적인 할머니들과 다른 분위기를 가진 해숙을 다채로운 연기톤으로 보여주고 있다. 해숙은 살아생전 일수를 다닐 때는 온갖 욕을 먹어도 멘탈이 흔들리지 않는 냉철한 일수꾼이지만 남편 앞에서는 한없이 다정한 아내다. 김혜자는 삶의 무게를 견디는 인물의 모습부터 소녀 같은 감성을 입체적으로 표현해 보는 맛을 살리고 있다.
여전히 작품을 통해 공감과 위로를 전하고 싶은 마음이다. 김혜자는 “하고 싶은 것도, 관심 있는 것도 연기밖에 없다. 다른 것은 빵점이고, 연기하는 게 제일 좋고 행복하다”며 “나이를 생각하면 이 작품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지만 덕분에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신구(88)와 박근형(84)은 연극 무대에 오르며 정정함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달 13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진행하는 ‘고도를 기다리며’ 특별공연에 선다. 2023년 12월에 진행한 개막공연을 시작으로 지난해 지방 투어까지 진행했던 두 배우다. 투어 공연이 연일 매진을 기록하면서 받은 사랑을 보답하기 위해 이번 공연을 기획했다.
특히 티켓 수익금을 청년 연극인들을 지원하기 위한 연극내일기금으로 전액 기부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연극으로 연기를 시작해 오랜 시간을 무대에서 살아왔기에 연극계가 다시 조명받고 환경이 개선되길 바라는 대선배의 마음이 담겨 있다.
박근형은 “노년의 배우로서 이 작품을 해낼 수 있는지 실험적인 면도 있었다. 의외로 많이 호응을 해주셔서 감개무량할 뿐 아니라 정말 감사했다”며 “신구 형님과 이번을 계기로 뭔가 해보자고 이야기했다. 환경이 열악한 연극계를 위해 조그마한 힘이지만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2021년 영화 미나리로 한국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윤여정(77)은 안주하지 않고 꾸준히 다양한 작품에 도전하고 있다. 영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2020)에선 치매 걸린 노인의 모습부터 원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사수하려는 인물을, 미나리에선 가정에 헌신적이기만 한 타입에서 벗어나 따뜻한 사람으로서의 한국 할머니를 보여줘 주목을 받았다.
최근 미국에서 개봉한 영화인 결혼피로연에서 또 다른 K-할머니를 연기한다. 결혼피로연은 시애틀을 배경으로 레즈비언 커플인 엔젤라(켈리 마리 트란)와 리(릴리 글래드스톤), 게이 커플 민(한기찬)과 크리스(보웬 양)까지 총 네 인물이 각자의 사연과 욕망으로 얽히며 벌어지는 위장 결혼 소동극이다. 윤여정은 극 중 동성애자인 손자 민의 할머니 자영을 맡았다. 손자를 받아들이고자 하면서도 전통적 가치관과의 충돌로 고민하는 인물이다. 미국 현지 언론은 “미나리 속 할머니와 달리 불신과 후회의 감정이 겹겹이 쌓인 복잡한 인물로, 윤여정은 여전히 장면을 장악하는 존재감을 보여준다”고 호평했다.
윤여정은 “국민 배우 타이틀은 싫다. 오로지 나는 매 순간 변화를 위해 노력할 뿐”이라며 “아직도 편견을 깨고 싶고, 도발도 하고 싶고, 늘 도전하는 자세로 작품 속에서 살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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